그때 그 서울 임인식 작가 사진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사진전 하는데 보러 가지 않을래요?”
지인의 제안에 관심을 보인 네 명이 뭉쳤다. 겨울 햇볕이 따사로운 토요일 오후, 역사박물관 앞에 도착하니 제일 먼저 눈길을 끈 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전차 381’의 풍경이다. 전차에 이미 올라탄 아들에게 다급히 도시락을 건네려는 아기 업은 엄마와 손 인사를 하는 여동생의 모습이 이것에서의 시간여행을 암시하는 듯하다
정문 우측에 걸려 있는 ‘ 그때 그 서울, 임인식 작가 사진전’이라는 흰색 대형 포스터가 기대감을 부풀린다. 전시된 사진은 물론이거니와 평생 찍은 작품을 모두 기증한 임인식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궁금해진다.
그는 6.25 전쟁 종군기자이자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이다. 평안북도 출신으로 해방 직전부터 용산 삼각지 부근에서 한미 카메라점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울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은 1,003점 중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인 1945년부터 1965년에 촬영된 사진 140점을 전시한다. 6.25 전쟁 전후의 기록사진 외에도 그 시절 그의 눈과 렌즈가 향한 곳은 서울의 뒷골목, 남대문시장, 북촌, 청계천, 한강, 고궁 등 다양하다. 이번 전시는 코너마다 주제가 있는데, 상전벽해를 이룬 지금의 서울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옛 모습이 다양하게 담겨 있다.
사진에 대한 그의 열정은 민간인으로서 최초로 경비행기를 타고 직접 촬영한 항공사진만 봐도 엿볼 수 있다. 전쟁의 폐허더미에서 복구되어 가는 도시의 모습을 찍은 ‘하늘에서 본 서울’은 그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다. 또 남대문시장 상인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 모습, 시민들의 휴식처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을 찾은 시민들의 평화로운 모습, 골목길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담은 사진을 보면 왠지 마음이 숙연하고 평온해진다. 몇 장의 사진은 서울 토박이인 내가 어린 시절 보았던 제기동 한옥 주택 골목길과 창경궁 모습 그대로여서 반갑기까지 하다.
그는 사소한 것을 지나치지 않고 소중하게 담아내는, 사람과 장소에 대한 애정이 풍부한 사람인 것 같다. 어쩌면 더 이상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투영하지 않았을까? 사후에는 매년 전시를 보러 오는 이들을 맞이하며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연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시 중 나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상업과 놀이의 공간 한강’ 코너이다. 백사장이 길게 형성된 뚝섬유원지에서 여름철에 피서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과 겨울철 꽁꽁 언 한강에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긴 사진을 보며 ‘그때 뚝섬에서 생긴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온 가족이 뚝섬유원지에 놀러 갔다. 사 남매는 팬티 바람으로 한강 물속으로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수영을 배웠다. 배를 두 손으로 받치고서 몸을 물 위에 일직선으로 뜨게 한 아버지는 발을 힘껏 차며 앞으로 나가라고 하였다. 물 위에 붕 떠 있던 나는 아버지가 손을 뗄까 봐 두려웠다.
“아빠 손 놓지 마요. 손 놓으면 안 돼요.”
“그래 잡고 있어. 발을 힘껏 쳐.”
두 손을 앞으로 쭉 뻗고 두 발을 상하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아버지가 배를 받치고 있던 손을 이미 놓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어느 만큼 갔을까? 물 위에 혼자 떠 있다는 걸 알고 일어서려 허우적거렸지만, 몸은 거꾸로 물속으로 쭉 빠져들었다. 생전 처음 느껴 본 ’아! 죽는구나 ‘라는 공포감.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다가 가까스로 발이 바닥에 닿은 걸 느끼고 살았다며 일어선 순간, 얼마나 부끄럽던지. 물의 높이가 허벅지에도 못 미치는 것이 아닌가! 죽을 뻔하다 살아난 안도감을 만끽하기엔 민망해서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뚝섬 하면 떠오르는 추억의 한 장면이다.
그때 물속에서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갔던 건 아버지가 나를 받쳐 주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시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행동의 시작이다. 내가 아버지를 믿었던 만큼, 아버지는 평생 나를 믿어준 가장 든든한 응원군이었다. 이제는 사진으로 밖에는 만날 수 없는 아버지가 그립다. 그리움을 달래기에 사진만큼 좋은 것이 없다. 이날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 한 장엔 뚝섬 백사장을 배경으로 훤칠하고 잘생긴 아버지가 가운데에 앉아 있다. 그 옆에서 모래를 두 주먹에 잔뜩 쥐고 있던 나, 수줍게 무릎 꿇고 앉아 있던 언니, 깡마른 모습으로 서 있던 남동생, 원피스 차림의 날씬한 엄마, 팬티조차 입지 않은 막내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 사진은 온 가족이 찍힌 몇 장 안 되는 소중한 사진이다. 가끔 앨범을 펼쳐보고 싶은 건 나와 내가 아는 사람들의 빛나고 기쁜 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때 그 서울'사진전을 보며 내 고향 서울의 기억하고 싶은 장소와 시절로 돌아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한 히루다. 오늘 같은 날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과정이 바로 사진’이라고 하는 말에 깊게 공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