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문화빵칼
신민준 _ 문화연대 집행위원
2021년 10월 서울문화재단의 새로운 대표이사로 이창기 대표이사가 취임하며 서울의 문화 현장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그 변화가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이 칼럼에서는 대표이사가 바뀐 이후 서울문화재단의 변화를 짚어보며 문제점을 살펴보고, 그 문제가 비단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임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창기 대표이사는 2022년 10월 취임 후 숨을 고른 후 2022년 1월 <서울문화재단 3대 전략 10대 혁신안>을 발표했다. 이후 서울문화재단의 정책과 사업은 빠르게 급변했다. 새로운 전략이 발표된 지금, 이 정책이 현장에 어떤 파급효과를 일으켰는지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살펴보자.
For 예술가, “코로나19로 위축된 예술가를 위해 예술지원정책 다변화”
① ‘서울예술상’ 최초 제정… 그물망 예술지원체계로 촘촘하게
② 융복합 예술 및 예술인 NFT 도입 등 가상 플랫폼에서 미래예술을 선도
③ 新대학로 시대를 이끈다! 대학로극장 쿼드·서울연극센터·잠실창작스튜디오
④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창작초연 중심의 1차 제작·유통 극장’으로
⑤ 예술인 지원정보 접근성 강화한 서울형 예술지원 공공 앱(App) 론칭
⑥ 지원 밖 예술가를 위한 ‘서울예술인 희망 캠페인’ 추진
For 서울시민, “문화향유 프로그램 획기적으로 증대
⑦ 사계절 내내 축제를 즐겨라~ ‘서울아트페스티벌 시즌제’ 첫 도입
⑧ 한 달마다 찾아오는 지역예술공감 콘서트 ‘스테이지 11’ 신설
⑨ 예술교육가 한자리에 ‘서울예술교육 [예술로 참여]’ 개최
For 예술계, “투명하고 공정한 예술환경 시스템 구축”
⑩ 공정한 심사체계 개편, 예술인 新거버넌스 ‘서울문화예술포럼’ 발족
전략1. 코로나 19로 위축된 예술가를 위한 예술지원 정책의 다변화는 하부 여섯 개 전략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각각의 전략이 정말 예술가를 위한 예술지원 정책의 다변화를 발생시켰는지에 대해서 필자는 매우 회의적인 입장이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물망 예술지원체계”라고 하지만 실상을 뜯어보면 이는 2019년 <서울문화재단 지원체계 개선연구>(책임연구원 이동연)가 문제점으로 삼았던 문제의식을 다시 역행하는 정책이다. 이 연구는 2017년 이후 급격하게 예산이 증가하며 세대 갈등으로 번지던 세대별 구분에 의한 예술지원 정책의 개선 방향을 제시했고, 재단은 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정책을 새롭게 구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신진 예술인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은 살리되 예술가의 특수성과 성장 경로를 고려하여 나이가 아닌 경력을 중심으로 지원체계를 개편하였다. 그물망 예술지원체계는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청년 예술인과 장년 예술인의 지원 트랙을 다시 신설한 것이며 다시금 세대 갈등의 여지를 만들게 되었다. 또한 ‘예술상’이 그물망 지원체계 안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지원체계라고 할 수 있을지, 2020년대에 ‘예술상’이라는 사업이 과연 예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 시킬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융복합 예술 및 예술인 NFT 도입”은 그 자체로 공공정책에 대한 이해가 없음을 보여주는 정책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정책은 제반 비용과 투자 대비 효과성 등을 이유로 민간에서 실행할 수 없거나 실행하지 않는 영역으로 구성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산업 진흥의 차원으로 활성화를 유도하는 정책으로 구성한다. 그런데 이 정책은 서울문화재단이 직접 NFT를 발행하는 것과 별 다를 바가 없다. NFT에 대해 가지는 예술가들의 의심은 차치하더라도 공공에서 할 만한 사업이 아니다.
“지원 밖 예술가를 위한 서울예술인 희망 캠페인”은 예술인 정책을 논할 때 주요한 문제 설정 중 하나인 ‘시혜성’에 대한 일말의 고민도 없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하는 정책이다. 2000년대 예술인 복지를 위한 운동의 흐름과 2010년대 블랙리스트를 거치면서 예술인 권리를 중심으로 한 담론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 정책은 다시 시혜성의 테두리에 예술인을 가둔다는 점에서 표현부터가 문제가 있다. 그 안에 담긴 내용 또한 예술인들의 예술 활동에 대한 홍보를 활성화하는 정책이다. 사업 내용을 보면 앞선 이름의 문제조차 거창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예술가를 위한다는 (시혜적인) 선언’은 많지만 정말로 제도 내에서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할 <예술인 복지 기본 계획> 즉, 예술인 플랜을 수립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016년 서울시의회는 <서울예술인 복지 증진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고, 입법안은 강행 규정으로 5년마다 시행 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1차 기본 계획이 2016~2021년 기간 동안 실행되었기 때문에 규정대로라면 2022년에는 2차 기본 계획을 수립했어야 한다. 또한, 2차 기본 계획은 이미 서울연구원과 서울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연구를 시행하였다. 그러함에도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기본 계획을 수립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재단의 대표이사는 2022년 예술인 거버넌스와의 간담회에서 “해당 업무의 책임은 서울시에게 있다. 서울시가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서울시 문화본부와 서울문화재단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이를 표면 그대로 납득하긴 어렵다.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의 업무 공조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전략2. 서울시민, 문화향유 프로그램 획기적으로 증대는 하부 세 개 전략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전략은 한동안 문화정책이 문화민주주의에 근간하여 참여를 기초로 했던 방향에서 다시 수동적 향유로 회귀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2022년 새롭게 신설된 “서울생활예술페스티벌”은 25개 서울시 자치구에서 활동하는 생활예술 동아리들을 장충체육관에 모아서 일거에 진행하였다. 생활예술 정책의 가장 기본 전제는 수월성에 기초하지 않고 일상에서의 문화적 참여에 기초하는 것인데 이 페스티벌은 정면으로 이 전제들을 위반한다. 또한 현재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이 자치구 참여 예산, N개의 서울 등 자치구로 내려가는 사업과 예산을 점점 축소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구조는 퇴행하면서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사업만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테이지 11”은 서울문화재단이 보유한 공간에서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한 번 평일 오전 11시에 공연을 진행하는 사업이다. 그런데 평일 오전 11시에 공연을 보러 올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일까? 주지하다시피 문화 향유를 위해서는 일종의 취향이 형성되어야 하고, 시간이 필요하다. 이는 계급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평일 오전 11시에 하는 문화 공연을 모두를 위한 행사라 할 수 있을까?
“서울예술교육 [예술로 참여]”는 사실 새로운 정책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기존에 있던 사업들을 모아서 한 시즌에 집중적으로 펼쳐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서울문화재단의 TA(Teaching Artist)제도는 2023년이 되면서 서울시 교육청, 서울시 문화본부와의 업무분장 문제로 기존 규모와 비교해 상당히 축소되었다. 재단은 이에 대해서 원칙대로 돌아간 것이라 주장하지만, 다른 정책을 제시하지 않는 한 예술교육에 관한 관심이 부재하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전략3. 예술계, 투명하고 공정한 예술환경 시스템 구축은 전문성 검증 강화를 중심으로 하는 심사 체계 개편과 새로운 거버넌스 구축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새로운 것은 없고 오히려 퇴행적이다.
서울문화재단은 “공정한 심사체계 개편”을 위해 심의위원의 경력 조건을 7년에서 10년으로 늘리고 검증 절차를 강화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정한 심사체계는 심의위원의 경력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기존 심사체계의 문제를 극복하고 보완하기 위해 동료심의제도 · 지정심의 제도 등이 실행되어왔고, 해외에서는 다양성의 관점에서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심의위원의 대표성을 다양하게 구성하고 비전문가까지 참여시키기도 한다. 지금의 방향은 공정성 강화를 명분으로 전문가 중심주의로 회귀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원사업을 통한 검열이 일어났던 블랙리스트 사태는 심의위원이 검증되지 못하거나 그들의 경력이 부족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이제 이 글을 쓰게 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인 거버넌스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재단의 대표이사는 취임 이후 기존에 구성되어 있던 서울문화재단 거버넌스, 특히 예술청에 대해서 공정성의 문제를 제기했고(그는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서울시의회의 지적 사항이라고 말한다) 더 넓은 의견 수렴을 위해 新거버넌스 “서울문화예술포럼”을 발족할 것을 천명했다. 이후 서울문화예술포럼은 2022년 1회 <포스트 코로나 문화예술 전망과 서울의 문화전략>, 2회 <기후위기와 문화예술>을 개회했고 2023년에는 3회 <서울시민 문화향유 실태와 정책방향>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이 포럼은 강연인지 공론장인지 정체성도 모호하고 이 공론장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재단의 정책에 반영되기는 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 거버넌스가(사실 거버넌스라고 할 수도 없는 공론장이) 재단의 기존 예술인 거버넌스를 ‘패싱’하면서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2016년 <서울시 예술인 복지 증진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고 시행 계획으로 수립된 <서울 예술인 플랜>은 지속가능한 예술환경 조성을 핵심 비전 중 하나로 수립하고 예술청 조성을 제시하였다. 이후 예술청이 구체화되고 서울문화재단의 거버넌스를 중심으로 한 운영이 강화되면서 예술청은 단순히 예술 창작 활동 공간이 아닌 상징적인 예술인의 허브, 참여 플랫폼으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서울문화재단은 예술청을 포함하여 서교예술실험센터, 삼일로창고극장, 청년예술청 등 기존의 거버넌스를 패싱하고 신거버넌스라고 주창하는 서울문화예술포럼을 발족시켰다. 더구나 공정성을 문제 삼아 더 넓은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발족시킨 새로운 거버넌스의 구성원이 누구인지, 어떠한 과정으로 위촉되었는지 알 수 없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2016년 첫 계획 수립 이후 4~5년에 걸친 준비 과정과 서울의 수많은 예술인의 참여를 통해 만들어졌던 예술청은 만들어진 지 2년 만에 재단으로부터 해체를 통보받았다.
서울문화재단의 문제는 문화자치가 불가능한 구조적 문제
최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정치인 출신이 선임되어 논란이 되었으나 적어도 호선제로 복원되면서 그 결정에 책임을 질 사람들이 생겼다. 위원장의 행보는 지켜봐야겠지만, 그 결과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타난다면 적어도 그를 선출한 위원들이 책임을 지게 되고 역사적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재단 구조에서는 제대로 된 공론이나 연구가 없이 일방적으로 대표이사의 관점을 강요하고 밀어붙여도 나중에 책임질 사람이 본인과 특정 정당의 정치세력밖에 없다. 그들에 의해 선임되었으니까. 대표이사가 현장을 무시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뒷배가 시민-예술가가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이기 때문이다. 자기 뜻대로 일방적인 강행을 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더해, 저항이 있다면 요즘 대통령부터 실천하고 계시는 신자유주의 언어의 마술을 통해서 둔갑-프레이밍 시키면 된다. 저항하는 예술인들을 자기 이익에 탐닉하고 부패한 예술가로 몰아버리고 법·행정적 기술을 사용하며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성을 반영할 수 있는 기회는 유일하게 선거만이 남는다. 하지만 문제는 정치적 결정 과정에서 문화예술 영역이나 예술인의 결정력이 매우 미약하다는 것이다. 정치공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선거 정족수와 실 참여자 비율의 0.5~1%만을 문화예술인이 차지하고, 공약에서도 다른 사회·경제적인 공약에 비해 문화 분야의 정책-공약(다분히 관념론적 문화의 관점에서)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결국 선거에서 정책 구성 외에 문화·예술 영역의 사람들이 행사할 수 있는 결정력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재단의 대표자가 재단의 운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재단의 상태는 전체 예술가의 삶의 구조와 실존을 흔들지만, 지금은 민주적인 통로가 없어서 정작 당사자가 그 현실에 개입할 방안이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런 구조들을 형성할 수 있도록 재단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더 적절한 방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문화영역 안에서 자치적 지향을 품을 수 있는 구조가 될 수 있도록.
이러한 구성은 상호 견제의 장치로서 민주주의가 작동하게 만들고, 퇴행적인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적어도 문화예술 영역 안에서 책임질 사람을 만들어 장기적인 관점에서 역사적인 - 정치적, 정책적, 학술적, 예술적 등 다양한 관점을 망라한 - 평가가 가능하게 만든다. 지방 선거 이후, 서울문화재단뿐 아니라 많은 다른 지역에서도 퇴행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운동적 관점에서 해체와 재구성 주장이 가질 수 있는 의미
이러한 주장은 상황을 새롭게 프레이밍하고, 대중의 지지를 서울문화재단 ‘예술청’을 둘러싼 ‘잡음’이 아닌 형태로 전환하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 주장에 힘이 실리려면 물리적으로 대중들의 많은 참여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이러한 주장의 이유를 설명하고 납득시키고 ‘조직’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의 상황에서 어느 정도 가능할지 불투명하다. 그람시적인 관점에서는 조직가의 실천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여 비관하더라도 낙관하며 가능한 미래를 전망하라고 하겠지만, 정세가 좋지 않은 것은 명백해 보인다.
또한, 앞서 이야기한 이번 정부의 ‘언어의 마술’은 이 구호 아래 선 이들을 다시 구분 짓고 부패한 세력으로 몰아갈 것이다. 그리고 블랙리스트라는 역사적 상흔이 자기검열의 기제를 작동시켜 ‘조직’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느 한 시기에 이런 주장들이 돌출했다는 것은 그 구조의 모순을 보여주는 일이어서 다시 검토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실 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어차피 지금의 정세를 고려할 때 이기기 어려운 운동인 것은 명백해 보이니까.
거버넌스의 ‘효율성'에 대한 검토와 단상
거버넌스를 둘러싼 환경에서 거버넌스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용된 언술이 ‘효율성’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창기 대표이사가 근거로 삼는 노조의 요구도 검토해보면 사업의 효율적인 진행이 필요한데 거버넌스 구조가 이를 더 어렵게 하고 그 결과 재단 직원들이 심적으로 힘들어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민주성’의 원리 자체가 ‘효율성’과 배치되는 성질을 일정 부분 가진다. 이건 일상에서 혼자 하는 일과 함께하는 일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봐도 유추할 수 있다. 당연히 혼자 하는 일이 빠르다. 남의 의견을 듣지 않아도 되고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오롯이 개인이 지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협업의 경우는 다르다. 협업은 각자의 사고와 행동, 준거하는 가치가 다르므로 짧은 시간 내에 마치기 어렵다. 책임을 공동으로 진다는 특성 또한 속도를 내기 어려운 원인이다. 그렇지만 협업은 ‘우리는 모두가 더 나은 방향을 원한다’라는 전제를 가진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 속도는 느려도 상호협력과 상호견제 아래 옳은 방향으로 가게 될 확률이 높아지고, 어느 정도 신뢰 관계가 형성된 후에는 더 빠르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재단은 조직으로서 어쩔 수 없이 수직적인 위계와 서열을 가지고 있고, 이 때문에 재단 혼자 일할 때 일 처리가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그 결과가 더 긍정적인 방향이 될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지금 재단이 주창하는 이른바 ‘새로운 문화 르네상스’는 공론, 토론, 숙의, 연구, 검토 등이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효율적으로 빠르게 수립했을지 몰라도 그것이 정말 좋은 방향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해야 할 일은 거버넌스 자체를 부정하고 해체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더 나은 방향을 원한다는 가장 기초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서로를 힘들게 하는 원인들에 대해서 내어놓고 토론하고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며 ‘건강한 갈등’을 옹호하고 그 과정을 감내하는 것이다. ‘효율성’이라는 말 뒤에 숨어서 그 갈등을 방어해서는 안 된다.
한편 ‘효율성’을 추구하는 데에는 표면상의 이유 외에도 기관 평가, 인사 고과 등의 이유가 전제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결국 효율성이라는 말은 공공성보다는 개인이나 조직을 보위하는 논리를 다르게 포장하는 말일 것이다. 결국 효율성은 성과 중심의 사고인데 이는 계층적 진급, 정치적 욕망을 가진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사회와 현장에도 도움이 되는지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는 이미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빨리빨리 - 1년 중심의 사고 -가 남긴 병폐들을 알고 있지 않은가? 속도는 한국의 발전을 끌어올린 원동력이 되기도 했으나, 지금의 시대에는 빨리할 수 없는 것들을 빨리하게 만들어 ‘보여주기’로 전락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동력을 앗아가는 원인이 되고 있다. 사회적 참사, 공적인 합의인 정책의 소멸 등 우리는 일상에서 이를 경험하고 있다. 특정한 목적으로 설치하는 사업으로서의 거버넌스가 아니라 거버넌스 자체가 조직의 운영 원리와 구조가 된다면 효율성에 대한 문제도 다르게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서울문화재단의 해체와 재구성을 급진적으로 주장하자
우리는 문화자치를 위해서 예술청을 만들었지만 그걸 선출되지도 않는 권력이 일방적으로 해체하는 것을 보았고, 또 이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게 하는 방법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민주적 문화가 사회 내에 잘 정착되거나 구조적 DNA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이 상황을 바꿀 도리가 없단 생각을 한다.
전자가 어쩌면 도래할지도 모르는 채로 기나긴 과정으로써 수행해나가야 할 지속적인 과제라는 점을 고려할 때, 차라리 서울문화재단의 해체와 재구성을 요구하는 급진적 주장이 지금의 상황을 바꾸는 더 실현 가능한 방법일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