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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연대 May 27. 2020

부실한 블랙리스트 책임자
처벌이 낳은 괴물, 한민호

블랙리스트 가해자의 고소고발


2019년 1월 31일, 한 문화부 고위 공무원이 대한출판문화협회의 회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고,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민사소송까지 청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소송의 이유는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블랙리스트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통해 출판계 블랙리스트에 관여한 몇몇 인물들을 언급했는데, 이것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고 심적 고통을 겪게 했다는 것이다. 공무원이 민간단체 협회장을 고소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블랙리스트 가해자로 지목된 자가 블랙리스트 피해단체의 대표에게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는 사실은 당시 언론에도 많이 보도될 만큼 충격적이었다.        

  

‘블랙리스트 국가범죄, 정부와 국회의 추가 진상조사와 책임규명 약속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한다!’ 기자회견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바로 몇 달 전인 2018년 12월 31일에는 문화부 장관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블랙리스트 작성과 집행에 관여한 공무원들에게 대한 책임규명 이행계획을 발표했었다. 그리고 블랙리스트 실행역할을 했던 기관들에서는 블랙리스트 사건이 조용히 마무리 되기를 원하는 분위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공무원의 행보는 블랙리스트로 피해를 입은 문화예술계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한민호라는 인물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본격적으로 확대되던 시기인 2016년 3월에 출판, 방송, 미디어 분야의 업무를 관장하는 미디어정책관을 맡았던 사람이다. 당시 블랙리스트는 거의 모든 장르에서 전방위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중에서 출판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세종도서 사업이나 우수출판콘텐츠 지원 사업 등에서 블랙리스트가 작동되어 소위 정부의 눈 밖에 난 문화예술인들이 배제되었고, 출판분야 진흥기관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임원 선임과정에도 부당한 개입과정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당시 출판인쇄과 과장이었던 김일환이란 자가 블랙리스트 진행의 책임자 역할을 수행했음이 밝혀졌다.      

문제는 한민호는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출판분야 블랙리스트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증거는 없지만, 블랙리스트 실행자인 김일환 전 출판인쇄과장의 직속 상관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블랙리스트는 청와대에서부터 말단 행정조직까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뤄진 국가범죄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한민호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정황상 한민호는 출판분야 블랙리스트 사건을 진두지휘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백번 양보하여 한민호의 주장대로 자신은 블랙리스트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출판정책을 관장하는 고위직인 미디어정책관으로서 블랙리스트 실행 과정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방관 또는 암묵적 동조가 없이는 블랙리스트가 작동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한민호의 주장대로 ‘자신의 명예가 크게 훼손당해 심적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하더라도, 블랙리스트 실행기관의 고위직 공무원으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죄책감이 있었다면 블랙리스트로 피해를 받은 단체의 기관장을 고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블랙리스트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이유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점은 한민호의 사례가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책임자 처벌 과정에서 문제들과 맞닿아 있다.      

2017년 7월 민관합동으로 꾸린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는 11개월 동안의 조사를 통해 9,000여명에 달하는 문화예술인과 340여개 단체의 피해 사실을 밝혀냈고, 수사의뢰 대상 26명, 징계 권고 대상 104명 등 130명에 대한 진상규명을 권고했다. 하지만 2018년 9월에 문화부가 발표한 수사의뢰 및 징계 이행계획은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수사의뢰 대상 26명 중에 7명만 수사의뢰를 했고, 징계 권고자 중 문화부 공무원 44명 중에 10명에 대해서만 감사 처분인 ‘주의’조치를 내렸다. 주의는 공무원 징계 수위 중에 가장 낮은 처벌이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책임규명 권고안에 대한 이행계획을 보고 ⓒ문체부


당연히 문화예술계는 격렬하게 반발했고, 문화부는 대국민사과와 함께 수사의뢰 10명, 징계 1명, 주의 67명으로 처벌 수위를 높인 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블랙리스트 사건이 수천명에 달하는 문화예술인을 블랙리스트로 낙인찍고 배제해온 국가범죄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이런 부실한 책임자 처벌의 결과는 블랙리스트 사건은 마치 없었던 일인 양 생각하는 흐름을 만들었다. 사실 이전부터 블랙리스트에 대한 논쟁이 반복되는 것에 대한 피로감에 대한 이야기는 문화예술계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공공연하게 흘러나왔다. 거기다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문화예술인들의 심리까지 합쳐지며 ‘언제까지 블랙리스트를 이야기 할거냐’는 주장이 주류적 흐름이 되어가고 있다.      

한민호는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우리사회의 괴물이다. 만약 블랙리스트에 대한 엄정한 진상조사와 그에 따른 책임자 처벌이 진행되었다면, 최소한 가해자가 피해자를 고소고발하는 촌극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촛불부터 이어져 온 적폐세력에 대한 청산 작업에 대해, 적폐세력이 오히려 반격을 가하는 전환점의 시기였고 그 흐름 속에 한민호라는 인물이 나온 것이다.     



블랙리스트가 만든 괴물     


결과적으로 한민호는 블랙리스트 사건과 사후대응이라는 과정에 매우 안 좋은 선례를 남겼다. 물론, 한민호가 제기한 명예훼손 건은 불기소처분되었고, 손해배상 소송도 패소하였다. 하지만, 소송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한민호는 브레이크 풀린 폭주기관차처럼 막말 등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고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에 대해 ‘대한민국 지성사에 치명적인 해독을 끼친 책이다’라고 폄하하며 자신의 편향된 입장을 드러내기도 하고, ‘나 스스로 친일파라고 여러번 공언했다. 지금은 친일을 하는 것이 애국이다’는 등의 국민정서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망언으로 끝내 파면되기에 이르렀다.          

     

종로 지역구 우리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선거유세 중인 한민호 ⓒ뉴스1


그리고 지난 21대총선에서는 극우정당인 우리공화당에 입당하여 종로 지역구 후보로 출마했다. 한민호는 총선후보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대통령에게 직언하다 찍혔다’라는 식의 자리합리화를 통해서 파면의 부당함과 자신은 ‘할 말은 하는 투사’라는 거짓 이미지메이킹을 하고,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블랙리스트 사태를 겪으면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에 대한 강조를 꾸준히 해왔다. 특히 책임자 처벌은 피해자들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우리사회가 블랙리스트 사건이라는 아픔을 딛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재발방지를 위해서도 책임자 처벌을 중요하지만, 블랙리스트 사태를 통해서 반성하고 성찰하는 태도와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책임자 처벌의 중요한 목적이다.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를 대하는 우리사회의 부실한 대응과 태도는 한민호라는 괴물을 만들었다. 우리사회가 블랙리스트 사태는 과거의 일이고 이미 끝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제2, 제3의 한민호는 계속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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