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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문화운동과 문화정책의 핵심 과제_④문화자치

문화적 주권 회복으로의 '문화자치'

by 문화연대
[이후 문화운동과 문화정책의 핵심 과제]는 문화연대가 대선 이후 문화운동과 문화정책의 방향을 모색하며, ‘삶의 지속가능성’, ‘문화공공성’, ‘문화 민주주의’, ‘문화자치’라는 네 가지 핵심 과제와 이에 대한 대안을 제안합니다.


이제 '진짜' 문화자치의 시대로


강윤주_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문화연대 집행위원·협동조합 삶의예술 대표


12.3 계엄 당일 국회로 달려간 수많은 시민들에 의해 해제된 계엄, 또 그 이후 이어진 ‘키세스’ 시위와 전봉준 농민시위단 등의 활약은 ‘대한국민’의 자치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 성숙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결정적 사건들이었다. 12.3 계엄 사태에서 시민들은 수동적 피해자가 아니라 국회의사당과 거리로 뛰쳐나와 계엄 해제를 요구하고, ‘키세스 시민단’처럼 밤새 눈을 맞으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는 집단적 실천을 보여주는 공동체임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는 집단의식과 더불어 ‘따로 또 함께’라는 한국 특유의 연대정신이 위기 때마다 발휘되어 온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025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시민의 문화자치란, 단순한 문화 향유 증진을 넘어 시민이 문화 활동의 주체로서 자신의 문화권을 능동적으로 행사하고, 지역사회의 문화 정책 결정 및 집행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는 성별, 종교, 인종, 세대, 지역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시민들이 문화 활동에서 차별받지 않고 그들의 문화권이 보장되는 것을 전제로 하며, 문화예술뿐만 아니라 생활양식, 공동체적 생활 방식, 가치 체계 등 삶의 총체적인 영역을 아우른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은 중앙 정부 주도의 획일적 문화 행정에서 벗어나,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발현하고 주민 스스로가 지역의 당면 문제를 문화적 해법을 통해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 핵심적 가치를 부여한다. 시민의 문화자치는 궁극적으로 지역 주민의 일상 속 삶의 질을 제고하고 지속 가능한 지역 문화 생태계를 구축하는 중요한 기제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해외에서도 문화자치의 실질적 실험과 혁신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영국에서는 2025년 출범한 ‘시민의 힘 네트워크(Citizens In Power Network)’가 대표적이다. 이 네트워크는 문화기관의 의사결정 구조에 시민을 핵심 주체로 참여시키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예를 들어, 노팅엄의 New Art Exchange는 세계 최초로 시민의회를 기관의 공식 리더십 구조에 상설화해, 지역 주민이 직접 기관의 비전과 전략을 설계하도록 하고 있다. 버밍엄 뮤지엄, 컴브리아의 ‘Jury for Joy’ 등도 시민 배심원제, 시민의회 등 숙의적 거버넌스를 도입해, 프로그램 선정과 기관 운영의 방향성을 시민이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구조를 실현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의 ‘Clubture’ 네트워크와 자그레브의 ‘POGON’ (공공-시민 협력 기반 문화기관) 사례도 널리 알려져 있다. Clubture는 2002년부터 100여 개의 독립문화단체가 협력해 전국 각지에서 시민이 직접 기획·운영하는 1,300여 개의 문화예술 행사를 개최해 왔으며, 공공기관과 시민사회가 동등하게 운영권을 나누는 하이브리드형 문화기관 POGON은 도시의 유휴공간을 시민과 예술가가 함께 활용하는 모델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은 단순한 참여자가 아니라, 기획·운영·평가·재정 의사 결정에까지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지역의 문화정책과 생태계 혁신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시민의 문화권과 자치 역량을 확장할 뿐 아니라, 기존의 관 주도-공급자 중심 문화행정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적 거버넌스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국내 외에서 확산되는 문화자치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문화자치 역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제도적, 실천적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2025년 이후 이재명 정부는 문화자치를 국가 핵심 과제로 삼고, 다음과 같은 대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첫째, 문화기본법과 지역문화진흥법 등 법제도 개정을 통해 지역문화위원회 설립, 지역문화기금 조성 등 문화자치의 법적·재정적 기반을 준비하고 있다. 문화예산을 정부 총예산의 3%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시민참여예산제 등 거버넌스 혁신도 병행하겠다고 한다.

둘째, 지역문화재단의 자율성·전문성 강화, 지역문화정책사업 전달체계 개선, 생활밀착형 문화예술교육 거점 확대, 문화도시·예술마을 조성 등이 예정되어 있고 2030년까지 전국 50개 문화도시, 100개 예술마을이 지정될 예정이다.

셋째, 문화예술인의 권리와 복지, 사회적 돌봄 연계 일자리, 농산어촌 유휴시설의 문화재생, 기후위기와 AI 시대에 대응하는 문화정책 등도 중점 과제로 추진된다. 예술인 4대 보험, 기본소득, 창작공간, 블랙리스트 방지 특별법 등 창작권 보장, 문화와 돌봄·치유·평생학습 연계, 지역문화 기반 사회적 일자리 창출이 확대된다. 이재명 정부의 문화자치는 ‘지역의 고유성과 시민의 주체성’에 뿌리를 두고, 중앙-지방-시민사회가 함께 설계하고 실행하는 협치형 문화정책을 지향하고 있다.


한편 광역자치단체는 시민의 문화자치를 위한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고, 기초자치단체의 문화자치 활동을 촉진하기 위한 재정적 및 인프라적 지원을 제공하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경기도의 경우, 「경기도 문화자치 기본 조례」 제정 이후 최초로 2025년부터 2029년까지 5개년 간 문화자치 활성화를 위한 중단기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을 추진하기로 했다. 경기도는 시군 문화자치 활성화 공모 사업을 통해 기초자치단체가 제도적 기반을 조성하고, 시민 및 활동가 역량을 강화하며, 주민 참여 기반의 지역 문화 사업을 실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한다. 이는 지역 문화 생태계의 자생력 확보에 기여하며, 문화기반시설 확충, 유휴 공간의 문화예술 공간 전환, 박물관·미술관 소장품 확보, 도립 뮤지엄 콘텐츠 확충, 문화 시설 개·보수 등 다양한 정책이 병행된다.


기초자치단체는 광역자치단체의 지원을 바탕으로 시민이 문화자치의 주체로서 직접 참여하는 문화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현장 최일선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용인시의 사례는 실험과 연결의 문화자치, 즉 공론장에서 실천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용인에서는 문화자치조례 제정과 리빙랩네트워크 형성을 통해 지역, 장르, 영역을 넘어선 협력과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 느티나무도서관이 마을공동체의 플랫폼이자 문화자치의 헤드쿼터 역할을 하였다. 문화반상회는 미리 짜인 프로그램 없이 각 마을에서 지역의 문제를 찾아내고 해법을 실천하는 공간이 되었으며, 시민기술골목학교는 CoP(공동체실천조직) 형태로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배우고 공유하는 장이 되었다. 실무추진단(문화통장, 문화자치코치 등)은 각 반상회를 지원하고, 사업 종료 후에도 골목축제, 농부시장, 경로당 변신 프로젝트 등 지역사회 혁신의 엔진이 되고 있다. 시민기금은 시민, 기업, 단체가 자발적으로 조성·운영하는 자조기금으로, 사업 선정과 심사까지 시민이 주도하는 구조를 갖추었다.

부산문화재단의 반딧불이(빈집활용) 사업은 도시 유휴공간을 예술가의 창작공간으로 전환해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효과를 동시에 창출하는 모델로 주목받는다. 이 사업은 공간 기부자에게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예술인에게 창작 지원금과 프로그램 운영비를 지원하며, 지역 주민과의 협업을 통해 문화체험 기회를 확대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특히 2년 이상 장기 입주를 보장해 단발성 사업의 한계를 극복하였으며, 공간의 발견과 연결을 통해 책방, 목공방, 청소년센터 등 다양한 지역 거점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처럼 지역에서의 문화자치 실험은 공간과 사람, 그리고 기금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느티나무도서관의 사례에서 보듯, 마을공동체의 플랫폼은 특정 건물을 넘어 골목, 거리, 카페, 목공방, 온라인플랫폼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공간의 발견과 연결은 지역의 소상공인, 농민, 예술가, 주민 등 다양한 주체가 협력하는 네트워크 형성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에는 75,000개 이상의 카페와 수많은 예술인·개인 작업실이 존재하는데, 이들 공간이 지역 문화플랫폼으로 기능하도록 공간개방 지원금, 세제감면, 보험료 지원 등 실질적 지원이 필요하다. 부산의 ‘우리동네 문화공간 인증제’처럼, 임대료 지원과 인증제를 전국으로 확산하는 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지역문화진흥원의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은 2010년대 1,200개 공동체를 만들었으나, 예산 삭감으로 2022년 300개로 축소되었다. 일본 도쿄의 ‘마치즈쿠리 기금’처럼, 민간-행정이 1:1로 출자하는 공동체형 지원이 필요하며, 민간공간 활용과 지원의 필요성도 강조된다. 생활문화축제의 경우, 지역문화진흥원의 생활문화축제가 문화자치적 축제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비판적 견해가 꾸준히 제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실질적으로는 중앙정부의 프레임 복제, 관주도 기획, 형식적 주민참여, 행정구역별 획일성 등 한계가 뚜렷하며, 2022년 울산 사례에서는 프로그램의 78%가 외부 위탁업체에 의해 기획되고 예산의 65%가 홍보비로 집행되는 등 실질적 주민주도성이 약했다. 이는 문화자치가 아닌 문화적 동원에 가깝고, 지역의 고유성과 시민의 자율적 역량을 배제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화자치 관련 축제라면 중앙정부 통합적 축제가 아니라 각 지역별 특성을 살려 지역에서 축제를 열거나, 일본 국민문화제처럼 한 지역이 오랜 준비를 거쳐 그 과정에서 지역 네트워킹과 시민 역량이 강화되고 다른 지역을 초대하는 형태가 바람직하다. 실제로 일본 국민문화제는 3년간의 준비 기간 동안 지역 내 예술가, 소상공인, 주민이 협의회를 구성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타 지역 초청을 통해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순환형 축제 모델의 모범을 보여준다.


문화자치의 공간적 토대로는 민간 공간 활성화와 플랫폼 기능 강화가 필요하다. 민간 공간에 대한 공간개방 지원금 지급, 세제 감면, 보험료 지원 등 실질적 지원이 이루어져야 하며, 느티나무도서관의 마을포럼 모델을 확장해 커뮤니티 아카이빙, 지역예술가와 주민의 협업 프로그램, 공간별 통합 포인트 제도 등을 결합한 종합 플랫폼 구축이 요구된다. 앞서 언급한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문화자치를 위해 골목골목 이미 운영되고 있는 공간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대한민국에 많은 카페나 예술인들의 개인적·예술적 공간을 지역에 열 때 지원금을 주는 형태도 실질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단순한 행사 개편을 넘어 문화적 주권의 회복을 지향하며, 지역이 스스로 문화정체성을 정의하고 자원을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의 문화자치가 실현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남은 과제로는 민관 거버넌스의 강화, 행정과의 파트너십 확립, 문화자치 활동사례와 성과에 대한 적극적 홍보, 정보 접근성 개선, 지역 간 문화격차 해소, 문화주체의 정책참여 확대 등이 있다. 시민들이 더 이상 정책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이 되어 공간을 재편하고, 네트워크를 만들고, 자원을 조직하는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 실험과 혁신이 전국 곳곳에서 뿌리내릴 수 있도록, 정책과 행정, 시민사회의 긴밀한 협력과 신뢰, 그리고 지속가능한 지원체계를 만들어가는 것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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