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주의 문화행정 개혁
[이후 문화운동과 문화정책의 핵심 과제]는 문화연대가 대선 이후 문화운동과 문화정책의 방향을 모색하며, ‘삶의 지속가능성’, ‘문화공공성’, ‘문화 민주주의’, ‘문화자치’라는 네 가지 핵심 과제와 이에 대한 대안을 제안합니다.
김재상_문화연대 사무처장
문화에서도 민주주의의 원리가 실질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정부 기간 동안 특히 문화적 공공성과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후퇴했다. 그 결과 문화예술인의 자율성과 창의성, 문화정책의 독립성은 침해되었고, 문화행정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이 상황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문화행정은 왜, 어떻게 검열과 통제의 기제가 되었는가? 그러한 구조는 어떻게 형성되었고, 책임은 왜 흐려졌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특정 정권의 잘못된 정책과 행정을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시대를 거쳐 누적되어 온 문화행정의 악습과 작동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새롭게 재설계해야 한다는 필요성과 문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에는 경직된 관료주의가 자리한다. 문화행정은 본래 문화예술의 창의성과 다양성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현실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문화의 정치적 가능성을 검열·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 심광현 교수는 「문민정부의 개혁과 90년대 문화정책의 기본과제」에서 문화행정의 폐쇄성과 관료성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문화과정에 본래 내장된 개방성, 자발성, 창의성, 자유와 해방에 대한 갈망에 군부파시즘 체제가 느꼈던 두려움은, 문화 분야에 대한 탄압과 규제를 어느 분야보다도 더욱 야만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했다. 이로 인해 누적된 문화 분야 전반의 철저한 보수성, 문화계 인사들의 비민주성과 권위주의, 비창의적인 성격은 오늘날 문화개혁의 과제뿐 아니라 전사회적 개혁과정에 있어서도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가장 전향적이고 진보적이어야 할 문화예술분야가, 오히려 가장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영역으로 남게 되었음을 드러내며, 민주주의 원리가 절실히 작동해야 할 문화영역이 현실에서는 민주주의의 사각지대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화행정의 관료주의적 폐해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이어 윤석열 정부에서도 반복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는, 문화행정의 구조적 문제의 연속선상에서 정치권력과 행정권력의 일체화로 인해 표현과 사상을 국가로부터 통제당한 역사적 국가범죄이다. 블랙리스트는 단지 권력을 가진 개인들의 일탈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기획되고 하위 문화행정기관으로까지 하달되어 체계적으로 실행된 정책사업이었다. 이는 문화행정이 예술을 통제하는 도구로 악용된 대표적 사례이자, 관료주의의 병폐가 구조적으로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여전히 이러한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지 않았다는 점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반복된 문화예술 검열 역시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관료적 문화행정 구조가 지속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이며 같은 문제의 재현에 불과하다.
이처럼 반복되는 문제의 1차 책임은 특정 정권들의 정치적 선택에 있지만, 동시에 그 선택을 가능하게 만들고 현실화한 문화행정의 제도적 구조, 특히 관료제가 지닌 고유한 특성에서도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창길(2012)은 관료제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관료제와 관료를 동일시하는 입장으로, 관료제의 병리적 구조(비효율성, 비인간화, 경직성, 비민주성 등)가 곧 관료의 병리적 행태(책임 회피, 형식주의 등)로 이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문제의 원인은 구조에 있으며,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관료의 행태도 바뀌지 않는다고 본다. 반면 두 번째 시각은 관료제와 관료를 개념적으로 분리한다. 이 입장에서는 병리적 현상의 원인을 관료 개인의 행태에서 찾으며, 구조보다 행태 변화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관료제의 개념 재해석과 관료행태에 대한 실증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료제에 대한 시각이 ‘문화행정’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앞서 살펴본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에 비춰보면, 문화행정에서는 이 둘이 서로를 정당화하고 보완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문제를 심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경직된 관료제 구조는 관료에게 “이건 내 권한 밖”이라는 책임 회피의 근거를 제공하고, 수동적이고 비창의적인 관료의 행태는 절차 중심의 구조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문제에 대한 판단과 반성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구조적(관료제) 무책임과 주체(관료)의 무비판적 수용은 관료제와 관료 사이의 악순환적 동맹 관계를 형성하며, 서로를 문제 삼기보다는 서로를 통해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정당화한다. 문화행정의 병리적 현실은 바로 이와 같은 구조-주체의 결탁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따라서 문화의 민주주의는 선언적 가치나 정책 목표가 아니라, 행정 구조와 작동 방식이라는 구체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문화행정의 관료주의는 ‘공공성’이라는 명분 아래 예술의 자율성을 제한하고, ‘객관성’이라는 기술 관료적 논리로 정치적 표현을 검열해왔다. 문화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통제적·기술관료적 문화행정 악습의 해체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화행정의 구조와 운영 원리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이에 대한 이론적 분석과 실천적 대안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이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향을 제안한다.
첫째, 문화행정 전반에 시민과 예술가의 실질적인 참여를 보장하고, 공개성과 투명성을 강화하는 민주적 통제 메커니즘을 구축해야 한다.
둘째, 문화행정이 일반 국가행정의 패러다임에 종속되지 않도록, 문화체육관광부의 공보처 기능을 폐지하고 인사 행정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셋째, 문화행정의 특수성과 자율성을 반영하는 담론 형성과 정책 연구를 활성화해, 문화행정을 단지 기술적 관리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으로 (재)위치시켜야 한다.
이 중에서도 현 정권 교체 국면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문화체육관광부 인사 개혁이다. 문화정책 집행에 필요한 전문성과 행정에 대한 이해, 현장 감각을 갖춘 인사를 발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거 과정에서의 기여 여부에 따라 부처 수장을 낙점하는 엽관제 관행이 반복될 우려가 있다. 이는 정책의 전문성과 현장과의 괴리를 심화시키는 주된 요인이다. 아울러, 문화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는만큼 이를 담당하는 문화행정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인식도 함께 높아져야 한다. 그러나 문화행정에 대한 개념화나 사회적 담론은 문화에 대한 일반 인식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다. 문화행정이 문화정책의 핵심 집행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사회적으로 논의하는 자리가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 문화행정의 역할과 구조, 집행 방식 등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공론화가 시급하다. 또한 문화와 관련한 공공문제 해결 과정에서 문화정책과 집행 주체인 문화행정 간의 관계가 ‘어떤 정책을 수립할 것인가’에서 ‘어떻게 실행하고 운영할 것인가’로 시야가 확장되고 있다. 실행과 운영 과정에 더 많은 시민과 문화예술인이 참여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고 집행할 수 있는 구조를 고민해야 한다. (문화연대 「제21대 대통령선거 문화정책 제안서」, ‘10. 관료주의 문화행정의 전면적인 개혁과 혁신’내용 참고)
앞서 지적했듯, 구조적 무책임성과 주체의 비판 결여가 서로를 정당화하는 결탁의 사슬을 끊지 않는 한, 어떤 개혁도 현장에서 쉽게 무력화될 것이다. 문화의 민주주의는 단순히 예산을 확대하거나 기관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행정이 어떤 논리와 구조로 작동하는지 근본적으로 되묻는 문제다. 문화행정이 현장에서 실질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행정 운영 방식과 그를 둘러싼 책임 구조, 그리고 정책 실행 주체들의 태도와 감각까지 함께 변화해야 한다. 변화의 과제가 산적해 있지만, 현재 정부 구성 과정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조직 개편과 인사 개혁은 문화행정 관료주의 문제 해결과 행정 운영 원리 재설계의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문화행정의 구조적 문제를 체계적이고 속도감 있게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