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현신부님과 함께하는 백기완선생님 추모1주기 특별전시회
백기완선생님 추모1주기를 준비하는 준비모임에 함께하기로했다. 선생님이 살아생전 꼭 이루고 싶었던 일들중에 <노나메기재단>을 빼놓을 수 없다. 노나메기 재단은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모두가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선생님의 뜻이 담긴 일이었다. 후배활동가들과 유가족은 지난 1년여 시간동안 통일문제연구소에 모여 재단사업을 차근차근 준비해왔다. 그리고 추모 1주기에 맞춰 창립식을 했고 창립식 자리에는 선생님을 기억하는 많은 분들이 참석해서 모두가 올바르게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결의를 다졌다.
<노나메기재단> 준비팀은 백선생님 추모주간 일정들을 기획하는 자리를 만들어 회의를 했다. . 혜화동에 자리한 통일문제연구소는 낡고 허름한 60년이 넘은 양옥 2층주택이다. 주택 수리가 시급한 공간으로 2층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지만 허물어질 위험이 있어 올라가기 조차 부담스러울 정도이고, 1층 장산곳매가 걸린 정면 벽 은 누수로 얼룩이 심하다. 재건축을 해야했지만 재정문제등 여러가지 이유로 미루어진 집 수리는 결국 선생님이 살아 생전에 이루어 지지 못했다. 후배활동가들과 유가족 그리고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 결국 통일문제연구소는 역사의 공간으로 남기기로 했다. <백기완 기념관>이라는 이름으로.
<백기완 기념관>은 건물을 전반적으로 리모델링 하되 백선생님의 공간이었던 방 은 지금 모습 그대로 유지 시킨다는 원칙을 정했다. 겨울지나 이제 곧 봄이다. 수리가 시작되면 그 때 부터 재정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재정을 어찌 만들 수 있을까.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가던 순간 번쩍 떠오른 이름이 있었다. 문정현신부님이었다. 두분이 함께 만든 <두어른전>이 떠올랐고 이제는 안계신 선생님을 다시 기억하기에 좋은 기획사업을 만들 수 있을 듯했다.
문정현신부님께 서각을 부탁해보자. 백기완선생님이 힘겹게 써주신 붓글씨 36점을 다시 세상에 내보이고 그 글에 담긴 이야기와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면 좋겠다는 생각과 80세가 넘은 노구에도 서각작업을 꾸준히 하고계시며 여전히도 투쟁현장 연대와 평화를 지키는 일들을 쉼없이 하고계신 문정현신부님의 이야기도 함께 담아보고 싶었다.
신부님께 전화를 드리고 백선생님 1주기에 신부님이 꼭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통일문제연구소의 어려운 처지에 대해서도 말씀드렸다. 통일문제연구소는 수많은 노동자가 조언을 구하러 가기도 하고, 명절이면 인사를 드리러 가기도 하고, 때로는 시국을 걱정하는 논쟁의 자리이기도 하다. 집보다 더 오랜시간 이 공간을 지켜왔던 선생님의 공간이기도 하다. 용기를 내어 문정현 신부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사정이야기를 하며 서각을 부탁드렸다. 처음에 신부님은 "서각없어 너희들이 다 가져갔잖아~~" 하신다.
지난 2016년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을 짓기위한 재정사업으로 백기완선생님의 붓글씨와 문정현신부님의 서각을 받아와 <두어른전>이라는 제목으로 판매전시를 하고, 이때 만들어진 재정과 홍보를 통해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을 만들기 위한 재정마련의 초석이 되었었다. 이 때 신부님은 만들어 두셨던 서각 대부분을 후원해주셨었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앞 작은 서각작품부터 빠레트에 새긴 서각까지 모조리 가져다 팔아버린 전적이 있어서 죄송한 마음이었지만 염치없이 요청을 했다. "새로 만들어 주세요...."
백선생님이 써주셨던 글을 신부님이 서각으로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백선생님 일인데 내가 해야지!"
하시며 선뜻 수락을 해주셨다. 신부님은 몸이 많이 안좋으시다. 서각을 하시다가 손가락 부상으로 한 개의 손가락이 꺽인상태로 굳어져 도구를 잡는것도 쉽지 않다. 80세가 넘은 노인에게 한 점도 아니고 36점을 정해진 기간안에 서각해달라고 부탁하는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힘드시면 가능한 만큼만 작업해주셔도 너무 고맙게 받겠다고 말씀드렸다. 진심이었다.
"신부님 딱 한 점만 해주셔도 저희는 너무 고맙게 받을께요. 너무너무너무 고맙습니다"
그날부터 신부님은 서각작업을 준비하셨다. 신부님은 나무를 구입하셨고 나는 백선생님의 글씨를 실사출력해서 제주도 강정으로 보냈다. 그런데 출력된 종이가 두꺼워서 나무에 붙여 쓰기 적합하지 않았다. 신부님은 함께 있던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앏은 용지로 부분 재출력하고 조각된 출력물을 조합하여 서각나무에 옮겨붙이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일주일이 지나고 신부님은 매일 아침 연락을 주셨다. 나무는 이런걸 구입했고, 한지작업은 이정도 진행됐고, 첫번째 서각이 완성됐다면서 사진을 보내주셨다.
'민중의 배짱에 불을 질러라'
신부님이 선택한 첫번째 작품글씨다. 백선생님의 글씨가 문신부님의 서각으로 어우러진 글은 힘이 넘쳤다.
첫번째 서각작업후 신부님은
"첫 번째 서각! 아득하구나! 시작이 반이라...."
하시면 남은 작업이 많음을 이야기하신다 아마도 36점 모두를 서각으로 만들어 주실 모양이다. 힘드신데 모두 안해주셔도 되요. 36점에 대한 기대감이 동시에 들면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교차했다. 그 뒤로도 계속 연락이 왔다...
"몸이 뽀개지도록 하고 있소!"
신부님 몸살 나실까 걱정이었다. 신부님 주변에 계신분들도 그만하시라고 몸 상하신다고 걱정어린 잔소리도 했었다고 한다. 아침에 눈 뜨면 강정마을 해군기지앞 미사천막으로 가셔서 온종일 서각에 몰두하셨다고 한다. 그만하시라고 많이들 말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고 20개 완성했다며 문자를 받았다.
"나머지는 글씨가 작고 많은 것만 남았소. 남아있는 것도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 보겠소!"
그만하시라고 말하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웠지만 꾹꾹 눌러담고 고맙습니다만 반복했다. 결국 신부님은 36점 모두를 완성해주셨다. 신부님께 부탁드렸던 날짜보다 한 달은 빠르게 완성해주셨는데 그것은 신부님의 깊은 뜻이 있었다. 후속작업 표구만들기, 사진촬영등등 을 생각해서 서둘렀다고 말씀하셨다.
몸이 뽀개지도록 서각을 만들어 주신 이유를 모두 알 수는 없겠지만 처음 부탁드렸을때 이야기하셨던 것으로 그 마음을 가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고맙습니다.
"백선생님 일인데 내가 해야지!"
이번 전시 제목은 <기죽지마라>로 정했다. 마석추모공원 선생님의 묻엄으로 가는 길목에 작은 팻말을 세워 두었다. 팻말에 써 있는 문구 '기죽지마라' 그 길을 가다보면 힘이 난다는 사람들도 있고, 멀리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듯 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