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제자리 걸음하는 기후운동을 넘어설 수 있을까?

앙드레 고르,「에콜로지스트 선언」(1975)

by 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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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후변화를 위한 정부간 협의체(IPCC)가 발표한 제6차 보고서는 현재 수준의 온실가스감축으로는 기후위기를 막을 수 없다는, 수많은 기후활동가들이 외쳐왔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온실가스 순배출량이 정점에 달하지 않고 점점 증가할 추세라고 예정하고 있지만, 티핑포인트가 될 지구 연평균기온 1.5도 상승을 막기 위해서는 현재 대비 약 40%의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번 보고서에서 인상깊은 대목 중 하나는 생활방식을 변화시키려면 사회 전 영역에서 제도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윤보다는 지속가능성을 강조하는 탈성장 운동이 그러한 전환을 가속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보고서 승인시 초안 문장마다 만장일치여야 하기에 보수적으로 작성될 수 밖에 없는 IPCC 보고서의 특징을 감안했을 때, 이는 꽤 인상적인 대목입니다.


한편, 한국에서 기후위기와 관련하여 정부와의 전선은 한참 뒤쳐진 곳에 그어지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핵발전을 통해 탄소배출을 줄여, 기후위기에 대응하겠다는 터무니 없는 말이나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주요 논거는 비용논리입니다. 원자력 기술 개발과 수출을 통해 수백조원대의 시장을 사로잡겠다는 것입니다.


성장에 중독된 우리 사회는 마땅한 대안을 내놓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제도와 체제 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혁신적인 감축안이 선언된 들, 지금과 같은 시장 중심의 체제에선 기후위기를 결코 막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일상과 제도 전반의 문화적 재구성에 힘쓰고 있는 문화연대의 다른 운동과 마찬가지로, 스틸얼라이브 팀의 운동 역시 삶-체제의 전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앙드레 고르의 선구적인 작업에 빚지고 있습니다.


일찍이 프랑스의 진보적 이론가 앙드레 고르는 1970년대부터 자본주의와 국가독재 사회주의가 공통적으로 생산력 증대라는 치킨 런 게임에 빠져있다는 논조로 성장주의를 비판하며, 생태주의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바 있습니다. 그의 에세이 「에콜로지스트 선언」은 기후위기라는 리트머스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아니 야만을 넘어 생존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커다란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콜로지스트 선언」은 기존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 누락된 '제한된 자원'의 문제를 짚어냄과 동시에, 오늘날 기후정의라는 말로 환기되는 분배와 (불)평등의 문제 역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소비에트 연방처럼 독점적 국가 체계를 강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시민력을 키우는 방식으로 만이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앙드레 고르는 개인과 공동체가 자기부양 능력을 상실할 경우, 국가(또는 시스템)가 시민의 삶 개입하고 통제하게 되고 그 결과 정치·문화·사회가 획일화되고 다양성이 소멸되며, 이를 통해 국가 권력이 확대되는 악순환이 발생할 거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 경고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어떻게 그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돌려낼 수 있을까요? 기존 제도는 그대로 둔 채, 실행되지 않을 탄소배출량 감축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전문가 운동 혹은 자족적인 소비자 운동 등 제자리걸음하는 사회운동을 전환할 수 있을까요?


앙드레 고르가 「에콜로지스트 선언」에 제시한 아래 일곱가지 테제가 큰 힌트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첫째, 현대 자본주의의 위기의 원인은 생산능력의 과잉 발전 및 극복하기 어려운 희소성을 만들어 내는 현대 기술의 파괴성에 있다. 이 위기는 오직 새로운 생산양식에 의해서만 지양될 수 있다. 이 새로운 생산양식은 경제적 합리성과 절연하여 재생가능한 자원의 절약 및 에너지와 원료 소비의 감소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둘째, 경제적 합리성의 지양과 물질적 소비의 감소는 기술 파시즘적인 타율적 통제에 의해서도 또한 공생적인 자주조정에 의해서도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기술 파시즘은 오직 시민사회의 확대로써만 회피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확대를 위해서는 기초공동체의 주권의 증대를 가능케 하는 기술용구의 채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셋째, ‘보다 많이’와 ‘보다 나은’ 사이의 관계는 단절되어 버렸다. ‘보다 나은’ 것은 ‘보다 적은’ 것을 가지고 획득할 수 있다. 만인이 그것을 손에 넣어도, 극복할 수 없는 공해와 희소성을 낳지 않으며 보다 적게 소비함으로써 보다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만인이 향유할 때 누구에게도 쓸모가 있는 것만이 사회적으로 생산될 가치가 있으며, 그 역(逆)도 또한 설립한다.”

넷째, 부유한 나라에서의 빈곤의 원인은 생산의 불충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 재화의 성격과 그것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방법에 있다. 빈곤을 절멸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희소한 부, 즉 본질적으로 특정한 사람의 요청에 맞는 배타적인 부를 ‘사회적으로’생산하지 않도록 하는 경우일 뿐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특권을 주지 않고 또한 누구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것만이 사회적으로 생산될 가치가 있다.”

다섯째, 풍족한 사회의 실업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감소를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일하기만 한다면 훨씬 적게 일해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모든 노동이 평등한 사회적 승인과 보수를 받는 것은 빈곤 절멸의 조건임과 동시에, 노동에 적합한 모든 사람들에게 노동을 배분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여섯째, 사회적 노동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생산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시간의 감소는 자주관리적이며 자유로운 활동의 확대와 함께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생산에 의해 확보되는 필수품 외에, 모든 개인들은 이 자유시간 동안에 홀로 혹은 집단적으로 그들에게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잉여물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집에서 가까운 작업장과 협동조합에서 생산하는 무한한 종류의 재화와 서비스는 자유의 영역 확대와 상품관계의 소멸, 즉 시민사회의 확대와 국가의 소멸을 보증할 것이다.

일곱째, 소비와 생활양식의 획일성은 사회적 불평등과 동시에 소멸될 것이다. 모든 개인과 공동체는 제각기 스스로를 영위해 나갈 것이며, 오늘날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그들의 생활방식을 다양화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차등은 자유로운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 결과이며 사회적 보수와 권력의 불평등의 결과일 수는 없다. 자유시간 동안에 자율적 능력을 발휘하는 방식만이 차등과 윤택함의 유일한 원천이 될 것이다.



앙드레 고르가 "자주관리는 자주관리하기에 적합한 용구(用具)를 전제로 한다"라고 말했듯, 체제 전환을 위해서는 그에 맞는 ‘도구의 전환’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체제 전환을 위한 우리의 도구는 무엇일까요? 문화연대 기후위기운동모임 스틸얼라이브는 꾸준하고 또 진득하게 그 도구에 대해 탐구하고 또 만들어가겠습니다.







기후위기 앞 도서관

이미 도착한 기후위기의 시대, 기후위기에 함께 대응하기 위한 사회적 독서와 실천적 책 읽기를 모색합니다.

글쓴이 : 박이현 _ 문화연대 기후위기운동모임 ‘Still 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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