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라떼
2016년 10월 초 파견미술팀은 배 만들 아이디어를 모으기 시작했다. 2011년 부산 영도에 희망버스가 달려갔듯 거제도를 달리는 희망버스가 시동을 걸고 있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로 마음이 심난했던 시기에 조선소 하청노동자 블랙리스트 이야기는 고민의 여지없이 파견미술팀을 한 자리로 불러 모았다.
지난 15년간 조선사업이 호황일 때 정부와 자본은 정규직 대신 다단계 하청으로 조선소를 채웠다. 조선소 노동자의 70%가 비정규직인 대한민국 하청조선소. 1차 하청-2차 하청-물량팀-돌관팀, 일용직에 이르는 다단계 고용구조는 조선소 노동자들을 소리없는 죽음으로 내몰았다. 원청이 하청의 기성금을 깎으면 하청노동자들은 다단계 구조로 임금이 깎이고 체불되고 일자리를 빼앗긴다. 조선소 원청은 블랙리스트로 하청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막아왔고, 노동자들은 체념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 노동자들이 10월29일 거제에서 조선 하청노동자 대행진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하청의 설움과 분노를 이야기하려 한다. 우리는 그들을 응원하고 함께 하려고 한다. /불안전노동철폐연대
아주 큰 (모형)배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길이 7미터 높이 3미터로 된 이른바 <고용안정호>다. 의기투합한 작가들은 각자의 작업공간에서 재료와 구조 등을 고민하고 SNS틑 통해 모델링한 아이디어를 공유했고 의견을 모아 재료와 이미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작업시간과 공간을 정했다. 사전작업이 많이 필요했고 희망버스가 거제로 가기 전 거제로 내려가 현장작업으로 마무리해야하는 꽤 큰 작업이었다.
2016년 10월 24일 안산에 있는 이윤엽작가의 집에 모였다. 미리 주문한 나무들을 보니 숨이 턱 막힌다. 작업량을 알 수 있는 규모였다. 파견미술팀 8명은 온종일 나무를 자르고 판을 연결하는 재단작업만으로 하루를 보냈다. 허리도 아프고 관절마디마디가 쑤셔댄다. 저녁을 먹고 뉴스를 본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로 박근혜 정권과 한 판 할 생각을 하던 때였는데, 갑자기 최순실의 테블릿 PC가 나오면서 사회를 분노의 용광로로 들끓게 했다. 파견미술팀 모두 뉴스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늦은 밤까지 최순실, 박근혜 이야기로 뒤척이다 작업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찌뿌둥한 몸뚱아리로 작업을 시작하기 전 몸 풀기 놀이로 기분을 업 시키고 페인트칠에 돌입했다. 잘 마른 페인트 상태를 확인하고 거제에 보낼 트럭을 불렀다. 한 차 가득 실어 보내고 파견미술팀도 거제로 향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차를 나누어 타고 출발.
거제에 도착한 파견미술팀은 조선하청노동자 대량해고저지 시민사회대책위원회 사람들과 함께 인사하고 <고용안정호> 제작관련 이야기를 나누었다. 농성장이 있는 컨테이너 앞은 작업하기 좋은 공간이었다. 행진을 위한 작업이다 보니 바닥을 먼저 만들고 바퀴를 달아 고정해야했다. 안정감을 위해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바닥에 고정하기로 하고 농성 컨테이너 주변에 있는 흙을 모래주머니에 담아 옮기는 작업을 함께했다. 미리 도착한 상자모양의 기본재료들을 바닥면에 그려놓고 그려진 형태 위로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1단 쌓고 그 위에 배 모양의 판을 대고 다시 2단을 쌓고 판을 대는 형식으로 탑을 쌓아 올리다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조선하청노동자 대량해고저지 시민사회대책위 분들은 저녁식사와 술자리를 제안했지만 파견미술팀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지나가는 소리로 한 노동자분이 “우리랑 술 먹기 싫어서 거짓말 하는 거 같은데...”라며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거제도의 날씨는 가을을 느끼기에 너무 좋은 날씨였다. 맑고 하얀 하늘이 바다 같았고 하늘아래 서 있는 <고용안정호> 모형 배는 아득한 바다 위를 떠다니는 듯했다.
완성된 <고용안정호>는 거제로 내려오는 희망버스 승객들이 도착하는 곳인 거제시 아주공설운동장으로 옮겨졌다. 거제 희망버스는 3,000명의 시민이 3,000원씩 내 그 돈으로 <고용안정호>를 만들자는 기획으로 시작되었었다. 거제희망버스 참가 호소는 순식간에 참가자 4,000명을 넘겼고 최종 4,600명의 참여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파견미술팀은 아주공설운동장 희망버스 집회 장소에 도착한 <고용안정호>에 4,600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써내려갔다. 집회가 마무리 되고 행진을 시작하자 형형색색 <고용안정호>는 4,600명의 지지자와 고용안정을 희망하는 거제의 모든 조선하청노동자의 염원을 담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서울에서는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탄핵을 외쳤고 한반도의 끝 거제에서는 자본과 정권의 부실경영을 규탄하며 고용안정을 외쳤다. “정부의 정책실패, 기업의 경영실패를 노동자가 대량해고로 책임지고 있다. 정부는 기업 구조조정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노동자 고용조정이다. 정부의 대책은 ‘빛 좋은 개살구’, ‘요란한 빈 수레’, ‘속 빈 강정’이다.” 마이크를 잡은 연사의 소리가 들려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