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AI 프사 생성, 그려지는 세계

AI가 그려낸 지브리 스타일의 초상 앞에서

by 가다은

❝우리가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려지는 세계에서❞

AI가 그려낸 지브리 스타일의 초상 앞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지브리풍 얼굴을 걸고 나타난다.
어느 날은 친구의 프로필 사진이, 또 어느 날은 직장 상사의 프사가.

갑자기 말랑한 그림체로 바뀌어 있다.

익숙한 눈매, 어렴풋한 미소, 잔잔한 배경.
마치 모두가 한 편의 애니메이션 속 등장인물이라도 된 듯하다.


챗GPT에게 "지브리 스타일로 내 사진을 그려줘"라고 말하면 몇 초 만에 그림이 완성된다.
화면 속 나는 더 부드럽고, 더 젊고, 더 이상적인 얼굴로 바뀌어 나타난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스스로를 애니메이션화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림이 감탄을 불러오는 동시에 어딘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의 손끝에서 천천히 그려졌을 법한 감정들이

클릭 한 번으로 복제되고 소비되는 이 속도에 익숙해지는 것이 과연 괜찮은 일일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 ‘스타일’이라는 이름의 감정 모방 기계 안에 들어가 있다.

'지브리 스타일'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따뜻함, 아련함, 노스탤지어.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손에서 나왔는지,

혹은 AI의 알고리즘에서 나왔는지 이제는 구분이 쉽지 않다.


"지브리 이름을 더럽히지 마라."
원피스 감독 이시타니 메구미의 분노는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창작의 정체성에 대한 당연한 항변일 것이다.
우리가 흉내 내고 있는 것은 단지 그림체가 아니라,

누군가의 세계관이며, 수십 년간 쌓아온 감성의 뼈대일지도 모른다.


물론 기술은 아름답다.
사람들의 손에 창작 도구를 쥐여주고, 상상력의 속도를 배가시킨다.
하지만 그 기술이 타인의 감정을 압축하고 포장해, 한 장의 이미지로 환원할 때, 우리는 묻게 된다.
이건 예술일까, 아니면 감정의 상품화일까?


나는 어느 날 내 사진을 AI에 넣어보았다.
그리고 나온 그림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림은 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내 표정은 아니었다.
어딘가 익숙하고 예쁘긴 했지만, 나에겐 낯선 감정의 가면 같았다.

우리가 원하는 건 과연 나를 닮은 '지브리 스타일 이미지'일까?
혹은, 지브리 속 세계에 내가 닿고 싶다는 감정의 그림자일까?


AI는 점점 더 정교해지고, 우리는 점점 더 부드럽게 그것에 스며든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창작이란 본디 고통과 느림의 언어로 쓰여지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감정이란, 누군가의 삶이 깃든 시간이자, 대체될 수 없는 경험이라는 걸.


우리는 이제, 그려지는 것과 그리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복제된 감성에 안주할 것인지, 감정의 본질을 붙들 것인지.
프사 하나 바꾸는 일에 담긴 이 질문은,

어쩌면 지금 우리 시대 전체에 던져지고 있는 물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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