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에세이]‘쇼생크 탈출·변신·절규’ 고립과 희망

고립의 방, 희망의 틈: 앤디의 망치와 그레고르의 등껍질, 뭉크의 절규

by 가다은

세 개의 콘텐츠에서 찾는 고립의 방, 희망의 틈



인간의 영혼은 때때로 감옥에 갇힌 새와 같다. 자유를 갈망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고 차갑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앤디 듀프레인은 그런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의 손에 쥔 작은 망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철창을 뚫는 무기이자, 내부로 침잠하지 않기 위한 마지막 끈, 존재를 긍정하는 심장박동이다.


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존재가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 속 그레고르 잠자.
그는 벌레가 된 자신의 형상보다, 가족의 차가운 시선에 의해 더 깊이 고립된다.
그레고르에게 현실은 회피할 수 없는 벽이며, 탈출의 망치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는 침묵으로 소멸해가고, 가족은 그 소멸을 안도한다.
희망의 서사를 가진 앤디와는 달리, 그레고르는 절망의 윤리 속에 자신을 가둔다.


이 대조는 단지 문학과 영화의 대비로 그치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점점 더 '보이지 않는 감옥'을 양산해내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으나, 그 연결은 얇고 단절은 깊다.
SNS 속 정제된 문장들, 과시와 비교의 타임라인, 익명의 대화들 사이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감춘다.
노출된 채로 숨고, 연결된 채로 외로운 ‘투명한 고립’의 시대다.


이 지점에서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절규>는 하나의 전언으로 떠오른다.
붉게 일그러진 하늘 아래,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비명을 지르는 듯한 한 인물.
그는 세상의 소음을 견디지 못해서 귀를 막은 것일까?
아니면, 자신 안에서 터져나오는 울음을 듣고 싶지 않아서일까?
<절규>는 단지 한 사람의 공포가 아닌, 시대 전체의 불안을 응축한 시각적 절창이다.

뭉크의 인물은 자신의 내면과 싸우는 동시에 외부 세계와 단절돼 있다.

이는 곧 현대인의 초상이다.
과잉 소통의 피로 속에서 우리는 말문을 닫고, 고요 속에서 절규한다.

삶은 흐르고 있지만, 마음의 감옥은 굳게 잠겨 있다.
그 고립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기보다, 내 안의 목소리를 외면하며 시작된다.


고립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천천히, 일상의 틈 사이로 스며든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듯 보이는 삶에서도, 한밤의 침묵 속에서 문득 들려오는 내면의 괴성이 있다.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하다 보면, 우리는 그레고르가 되어간다 — 말 없는 벌레, 들리지 않는 존재.

그리고 어느 순간, ‘망치’를 손에 쥘 용기도 기억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앤디의 망치는 우리에게 남겨진 희망의 기호다.
그것은 벽을 뚫는 도구이기 이전에, 마음의 방을 여는 열쇠다.
절규하는 인물도, 벌레로 변한 사내도, 감옥 속의 인간도 결국 한 목소리를 품고 있다: 나를 보아달라고.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절규를 외면하지 않을 때, 비로소 고립의 방에 틈이 생긴다.
그 틈으로 희망이 들어온다. 그것이 인간이 인간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세상은 여전히 닫혀 있고, 고통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망치를 내려치는 손길 하나, 혹은 무언가를 ‘듣는’ 귀 하나가 누군가를 고립에서 건져낼 수 있다.

이 시대의 진짜 절규는 소리 없는 몸짓 속에 있고, 진짜 구원은 작은 연민과 주목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서로의 고립을 외면하지 않을 책임이 있다.
그것이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에세이] 고래가 뒤척이는 바다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