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굽은 새우는 오늘도 버틴다
고래들이 부딪힌다. 바다 위는 포효와 물보라로 흰 포말이 뒤엉켜 흐르지만, 수면 아래는 고요한 비명이다. 힘을 겨룬다며 치켜드는 이빨은 관세이고, 싸움의 진동은 곧 환율로 번진다. 그 아래, 이 땅의 ‘새우’들은 등을 말아 숨을 고른다.
달걀 한 판이 천 원 더 비싸졌다. 기름값은 어느새 천장을 뚫었고, 카드 명세서는 눈을 의심하게 한다. 그 어느 한 줄에도 ‘트럼프’나 ‘25% 관세’라는 말은 없지만, 모든 고통의 무게는 어김없이 여기, 평범한 식탁 위로 떨어진다.
어제는 아이가 김밥을 남겼다. 예전 같았으면 “편식하지 마”라며 다그쳤을 텐데, 이제는 그 김밥 한 줄이 다음 끼니의 반찬이 되기도 한다. 뉴스는 말한다. 금리가 내릴지 모른다고, 추경이 곧 풀릴 거라고. 하지만 통장의 잔고는 고요하고, 가게 문을 연 채 하루를 버틴 자영업자는 오늘도 손님 대신 희뿌연 공기와 눈을 맞춘다.
대출 이자는 꼬박꼬박 오르고, 가계부채는 비닐봉지처럼 천천히 숨통을 조인다. 그래도 버틴다. 버티는 것이 하루를 살아낸다는 뜻이니까. 누군가는 말한다. “어쩔 수 없어, 세계 경제 전체가 어려운 거야.” 맞다. 하지만 세계는 오늘 나의 라면값을 내주지 않는다.
거대한 말들, 무역적자, 통상 압박, 수출 타격, 이런 단어들이 흘러나오는 방송을 듣다 보면, 우리는 마치 어딘가 존재하는 기호 같기도 하다. 정책 속에선 존재하지만, 정책 바깥에선 투명한 사람들. 밥을 굶는다는 말보다 더 큰 현실은, 밥을 줄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조용히, 아주 오래된 습관처럼 버텨왔다. 아이의 도시락 반찬을 두 개에서 하나로 줄이면서도, 부모는 자책하지 않는다. 손님이 없는 가게 문을 매일 열면서도, 주인은 “언젠간 오겠지”라고 말한다. 이 애잔한 낙관은, 아무도 응원하지 않지만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무너지는 것은 나라의 재정이 아니라, 삶의 의욕이다. 정치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넘어진 것은 민생이었고, 세계가 움직일 때 가장 나중에 돌아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삶이었다. 우리는 세계화를 선택한 적도 없고, 고율 관세를 예견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가장 먼저 흔들린다.
고래들의 싸움은 끝날 기미가 없다. 관세는 오르고, 환율은 출렁이고, 경제는 춥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이 고요한 고통 속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퍽퍽하고 질긴 삶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다독이는 법을 알고 있으니까.
봄이 온다. 고요한 햇살이 어루만지는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는 라면 국물에 밥을 말고 있다. 오늘도 그렇게 한 끼를 버틴다. 내일은 조금 따뜻하길, 세상이 덜 아프길, 작은 소망을 품고 다시 눈을 뜰 것이다.
이 작은 바다 아래에서, 등 굽은 새우들이 만든 고요한 기적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