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머무를 것인가, 대통령의 자리와 국민의 마음
한 자리는 단순한 공간을 넘는다.
그곳은 걸음이 모이고 시선이 머무는 자리
역사의 무게가 얹히고 내일의 말들이 시작되는 점이다.
다음 대통령이 어디에 머무를 것인지를 둘러싸고 다시 물음이 시작되었다.
용산, 청와대, 세종, 광화문.
이 네 곳은 지도 위의 지명이기 이전에, 각기 다른 상징과 서사를 품은 풍경이다.
용산은 빠르게 이사 온 집 같았다.
무언가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입주하고, 서랍도, 복도도, 대화도 어색했다.
국방부 건물 위에 올라선 권력은 오래된 나무의 뿌리를 자르고 새로 심은 듯 불안했다.
청와대에서 떠나온 그 걸음이 빠르면 빠를수록, 우리는 왜 그리 숨을 고르지 못했을까.
거기엔 늘 경호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었다.
어디에서 국민의 목소리가 잘 들릴까.
어디에서 지도자가 제 안의 울림을 되묻고 되돌아볼 수 있을까.
이태원 참사는 거리의 붕괴가 아니었다.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위치가 만든, 치명적인 균열이었다.
청와대는 한때 권위의 성이었고,
또 다른 한때는 시민의 산책길이 되었다.
그곳을 다시 들어가는 일이 퇴행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문은 다시 열기 위해 닫히는 것이고
벽은 더 많은 창을 내기 위해 다시 세워지는 법이다.
청와대는 역사라는 이름의 시간을 품고 있다.
그 안에는 기쁨도 있었고 상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국민과의 시간, 실패와 반성의 기록이 고요히 퇴적되어 있다.
그곳은 돌아가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되돌아보며 새로 나아갈 수 있는
기억의 거울, 사유의 공간일 수 있다.
세종은 아직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은 도시다.
비서실과 국무회의, 회의실과 보고서가 흘러드는 그곳엔
미래의 정치를 다른 거리에서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헌법과 법률, 예산과 시간이라는
냉정한 문턱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세종은 바람이 머무는 도시이고,
이전보다는 설계가 먼저여야 한다.
욕망이 아닌 계획, 표심이 아닌 비전으로 다시 그려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기다리는 시간이다.
가능성이 성숙할 때까지의 긴 숨,
그 속에서 국민과 행정, 권력과 시민이
같은 언어로 호흡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광화문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거리였다.
출근길, 퇴근길, 촛불과 기도와 외침이 쌓이던
국민의 광장이자 민주주의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집무실이 되진 않는다.
권력은 시민의 곁에 있어야 하지만,
보호되어야 할 거리도 있고, 지켜야 할 선도 있다.
도심의 중심은 상징이 되어야 한다.
물리적 이전이 아닌 정신의 접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광화문은 ‘소통의 자리’로 더 정교히 설계되어야 한다.
집무실이 어디냐는 물음은, 결국 누구를 위한 정치냐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새 대통령이 머무를 자리는,
기술과 경호, 행정의 효율만으로 정할 수 없는 공간이다.
그곳에는 ‘국민의 감정’이 깃들어야 한다.
잊히지 않은 상처와 반복되는 불신,
또 다시 기대하고 싶은 미래의 희망까지
함께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어디든 좋다. 하지만 그 자리는,
누구보다 국민의 마음이 먼저 도착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국정’은 자리를 잡는다.
✒️ 대통령이 머물 자리는 지도의 한 점이 아니라,
국민의 정서가 머무는 풍경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