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에세이] 양심이라는 말이 돌아오는 저녁에

최재천의 <양심>에 관한 리뷰

by 가다은

양심이라는 말이 돌아오는 저녁에


한때 가장 일상적인 말이었던 ‘양심’은 어느 순간, 희화와 냉소의 도구가 되었다. “양심에 털 났냐”는 말이 누군가를 부끄럽게 만들기보단 웃음 짓게 만들었고, 양심을 화두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진지함의 파열로 여겨지던 시절. 그런 시간 속에서 최재천 교수는 『양심』이라는 제목을 들고, 잊힌 언어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 그는 말한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내 안의 깨끗한 무엇, 바로 양심이다.”


그는 과학자의 눈으로, 그러나 시인의 심장으로 이 책을 썼다. 냉철한 생물학적 시선은 윤리의 원형을 되묻는다. 양심이란, 흔들리는 감정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생존의 불씨이며, 공존의 언어다. 유튜브 채널에서는 담기지 못했던 미공개 이야기들을 통해, 그는 질문한다. 양심은 시대에 따라 소거되어도 좋은 감각인가? 아니면, 너무 오래 눌러둔 내면의 알람인가?


‘차마, 어차피, 차라리.’
세 글자가 가리키는 건 결정이 아니라, 그 직전에 찾아오는 감정의 떨림이다. 그는 비겁한 사람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 비겁함이야말로, 불편함을 인식하는 민감한 촉수였다. 그래서 결국 그는 제돌이를 바다로 돌려보내고, 벨라의 해방을 요구하며, 호주제 폐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얼어 죽을 양심'이 그를 몰아낸 것이었다.


동물들은 침묵하지만, 그 침묵 너머의 윤리가 존재한다. 배고픈 친구의 신음을 듣고 식사를 멈추는 실험쥐, 피를 토해 굶주린 동료에게 나눠주는 흡혈박쥐. 그는 말한다. 공감과 양심은 포유류가 타고나는 심성이다. 문제는 그것을 점점 무디게 만드는 인간 사회의 훈련에 있다. 진화가 우리에게 남긴 고요한 능력은, 지금도 살아 있으나 종종 잊혀진다.

그의 말 중 가장 깊은 울림은 여기에서 나온다.


“양심은 공평을 공정으로 이끈다.”


키가 서로 다른 이들에게 같은 의자를 나눠주는 것이 공평이라면, 작은 이에게 더 높은 의자를 주는 것이 공정이다. 정의는 법이 아니라 감각의 문제다. 양심이 무뎌진 사회에서는 법이 얇아지고, 사람의 마음은 둔해진다.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표현하게 된다.
그가 늘 강조하는 말. 그 사랑은 단지 연민이나 호의가 아니다. 그것은 관찰자의 책임이며, 지식인의 윤리다. 제돌이를 고향 바다로 돌려보내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것을 본다. 생태는 데이터가 아니라 시다.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양심>은 촉수다. 묻는다. 지금 내 안의 불편함은 살아 있는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세상이 건강한 사회라면, 우리는 그 저림을 잊지 않아야 한다.

최재천은 말한다.


“나는 숙론의 장을 만들고 싶다.”

그 장은 결론보다 분위기로, 논박보다 예의로 움직이는 토론의 평야다. 양심은 그곳에서 비로소 말을 얻는다. 시대가 저문다고 해서 윤리가 함께 저무는 건 아니다. 어느 저녁, 바람결처럼 돌아오는 그 말. 양심. 그것은 언젠가 다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가장 오래된 빛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에세이] 대통령이 머물 공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