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부.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1. 거울 속의 너, 혹은 나
스승과 제자는 흔히 위계의 사슬로 이해된다. 그러나 바둑판 위의 조훈현과 이창호는 그보다는 거울의 양면에 가깝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처럼, 그들은 다른 길을 걷지만 서로를 통해 자기 자신을 완성해 간다.
조훈현은 전율의 수읽기, 철저한 계산, 바둑의 신이라 불릴 만큼 냉철한 지배자였다. 반면 이창호는 숨소리조차 낮추며 기다렸다. 빈틈을 보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 돌들 사이에 감정의 흐름을 읽기 위해. 그의 침묵은 무기가 아니라 미학이었다.
2. 이성과 감성, 바둑이라는 영혼의 언어
조훈현의 바둑은 수학 같았다. 오차 없는 질서 속에서 정답을 짜내는 기술자의 정밀함. 나르치스가 신의 법과 진리를 좇듯, 그는 완벽에 집착했다. 하지만 이창호는 달랐다. 그의 바둑은 조각이었다. 손끝에서 미세하게 진동하는 감정, 의도된 공백 속에서 피어나는 우연의 서사.
마치 골드문트가 여인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한 조각에 새기듯, 이창호는 돌 하나에 사람의 삶과 마음을 실었다. 바둑판은 차가운 승부의 자리가 아닌, 영혼을 조형하는 무대가 되었다. 이성도 감성도 그 안에 깃들며, 우리는 그것을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 묻는다.
3. 몰락은 서사의 끝이 아니라, 시작의 문지방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진다. 그것은 무너짐이자 되돌아옴의 서사다. 그는 한동안 모습을 감추지만, 다시 돌아온다. 그제야 그는 알게 된다. 승리란 수의 정확함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고 나를 내려놓는 일이란 것을.
골드문트가 방황을 끝내고 돌아와 마리아상을 조각하듯, 조훈현도 자신의 실패 속에서 다시금 인간이 된다. 패배는 그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깊이였다. 무너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심연이 있었다.
4. 사라진 공동체, 다시 불러낸 바둑의 시절
1990년대, 바둑은 국가적 감정의 집이었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 조훈현과 이창호의 수를 숨죽이며 바라보던 시간들. 승부는 한 개인의 전쟁이 아닌, 모두의 감정이 깃든 잔치였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의 패배에 울지 않고, 타인의 승리에 환호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해체되었고, 감정은 분절되었다. 영화 <승부>는 이 단절된 시대에, 다시금 ‘함께 본다’는 감각을 불러온다. 그것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인간 사이에 놓여야 할 다리의 이름이다.
5. 바둑이라는 철학, 인간이라는 미완
나르치스는 말한다. “완성된 작품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인간은 언제나 미완이며, 그래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승부>의 서사는 이 미완성의 철학 위에 놓여 있다.
이창호도 조훈현도 완벽하지 않다. 그들은 지고, 이기고, 다시 지면서 인간의 얼굴을 갖춘다. 바둑은 그들에게 수의 논리가 아니라 존재의 언어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며, 타인과의 깊은 교감이다.
6. 경쟁의 시대, 우리가 잊은 질문
지금 우리는 빠르지 않으면 도태되고, 이기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신화를 살아가는 중이다. 승리의 미학은 찬란하지만, 패배의 철학은 지워졌다. 그러나 <승부>는 묻는다. “진정한 이김은 상대를 넘어서되 미워하지 않는 것이고, 진정한 패배는 부끄럽지 않게 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