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리뷰]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썩지 않는 영혼의 눈동자가 우리를 응시하고, 그래도 꽃핀 쪽에서 살아야

by 가다은

썩지 않는 영혼의 눈동자가 우리를 응시하고

그래도 꽃핀 쪽에서 살아야



■ 5월,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지 않아야 했던 이유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잊지 못할 냄새나 소리를 하나씩 품고 산다. 하지만 1980년 5월, 광주라는 시간과 공간을 통과한 이들에게 그 기억은 감각의 차원을 넘어선 하나의 상흔(Scar)이자, 절대 지워지지 않는 영혼의 낙인이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는다는 것은, 그 뜨거웠던 5월의 광주 도청 상무관으로 걸어 들어가 썩어가는 시신들 곁에서 함께 촛불을 밝히는 고통스러운 의식에 동참하는 일이다.

소설의 첫 문장을 열기 전,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왜 5월의 분수대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아야 했는가. 누군가에게는 축제의 상징이었을 그 시원한 물줄기가, 누군가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통곡이 되었다. 사람들이 군인의 총칼에 쓰러지고 머리가 터져 나간 그 거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풍경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참을 수 없는 아픔이면서 치욕이었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치욕과 슬픔, 그리고 인간의 존엄에 대한 처절한 보고서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고 있는 걸 봤는데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떨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p.69



■ ‘너’라는 시선으로 걸어 들어가는 역사


이 소설이 우리를 단숨에 압도하는 이유는 그 독특한 화법에 있다. 작가는 중학교 3학년 소년 동호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너’라는 이인칭 시점을 택한다. “너는 도청으로 향했다”라고 말하는 순간, 독자는 관찰자의 위치에서 밀려나 1980년의 그 아릿한 공기 속으로 직접 던져진다.

중학생 동호는 단순히 정의감 때문에 그곳에 남은 것이 아니다. 함께 시위 대열에 섰던 친구 정대의 손을 놓쳐버렸다는 죄책감, 그 ‘놓쳐버린 손’에 대한 부채감이 소년을 상무관으로 이끌었다. 동호는 그곳에서 매일 들어오는 시신들을 닦고, 인적 사항을 기록하고, 머리맡에 촛불을 켠다. 영혼들에는 몸이 없으니, 눈도 없을 텐데, 동호는 일렁이는 불꽃 속에서 그들의 눈동자를 본다.

서사는 시간의 흐름을 따르면서도 인물들의 영혼과 기억을 통해 입체적으로 변모한다. 동호의 죽음 이후, 이야기는 정대의 영혼(나), 살아남아 검열과 싸우는 은숙(그녀), 고문의 후유증으로 삶이 무너진 진수와 선주(당신), 그리고 30년의 세월을 아들의 학생증 사진을 품고 버틴 어머니(나)로 이어진다. 이는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 어떻게 수많은 개인의 우주를 파괴하고 그 파편들이 현재까지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옴니버스식 비극의 연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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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겹겹이 쌓인 시신들, 얽혀버린 영혼들


소설 속 인물들은 각기 다른 장의 주인공이지만, 그들의 영혼은 끊어낼 수 없는 가시철조망처럼 서로 엉켜 있다.


동호와 정대: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고 도망쳤다는 동호의 죄책감은, 죽어서 영혼이 된 정대가 동호의 곁을 맴도는 환상적인 리얼리즘과 연결된다. 정대는 시신들의 탑 밑바닥에서 자기의 몸이 썩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동호를 기다린다. 정대의 영혼이 느끼는 고독은 곧 동호가 도청에 끝까지 남게 되는 동력이 된다.

은숙과 선주: 도청에서 함께 시신을 돌보던 누나들은 살아남았기에 더 큰 장례식을 치른다. 은숙은 출판사에서 일하며 뺨 일곱 대의 고문을 받고, 삭제된 희곡의 문장들 속에서 동호의 환영을 본다. 선주는 수사관들에게 당한 형언할 수 없는 성고문과 신체적 폭력으로 인해 인간의 온기 자체를 증오하게 된다. 그들에게 삶은 곧 멈추지 않는 장례식이다.

진수와 동호: “우리는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다”라고 말하던 진수는, 어린 동호를 살려 보내지 못했다는 자책 속에 산다. 감옥에서 겪은 모나미 볼펜 고문보다 그를 더 괴롭힌 것은 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했던 순간들이었다. 결국 진수는 그 기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들의 상흔은 독립적이지 않다. 동호라는 소년의 죽음을 중심축으로 삼아, 살아남은 이들의 모든 고통은 그날의 도청으로 수렴된다. 작가는 이를 통해 묻는다. 과연 누가 살아남았고 누가 죽었는가. 육체는 살아있으나 영혼이 그날의 지옥에 갇혀 있다면 그것을 삶이라 부를 수 있는가.



■ 문장 하나하나가 ‘광주’다

한강의 문장은 비명보다 서늘하고 통곡보다 맑다. 작가는 참혹한 폭력의 현장을 묘사할 때조차 지독하게 아름답고 투명한 언어를 사용한다. 이 ‘아름다움과 추함의 불일치’는 독자의 심장을 더 깊게 찌른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p.57


이 문장은 폭력의 주체를 명확히 응시한다. 차가운 쇠붙이를 당긴 것은 결국 온기를 가진 인간의 손가락이었다는 사실, 그 따뜻한 인간성이 어떻게 악마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작가는 정교하게 파헤친다.

또한, 시신 냄새를 가리기 위해 향을 피우고 촛불을 켜는 장면에서의 묘사는 압권이다. 촛불은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도구가 아니라, 몸을 잃어버린 혼들이 머무는 마지막 눈동자다. 그 고요한 불꽃들이 일렁이는 상무관의 풍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시(詩)이자 절규다. 작가는 자극적인 수식어 대신 “반투명한 창자”, “습자지처럼 얇은 얼굴” 같은 감각적인 어휘를 통해 훼손된 인간의 존엄을 복원해 낸다. 문장 하나하나가 광주의 흙이 되고 피가 되어 독자의 혈관을 타고 흐른다.



■ 우리는 인간임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소설은 반복적으로 묻는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계엄군들은 시민들을 빨갱이나 폭도로 규정함으로써 그들의 인간성을 지웠다. 하지만 도청에 남았던 이들은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며 자신들이 ‘나라’의 일부임을, 존엄한 ‘인간’임을 끊임없이 증명하려 했다.

어린 동호가 촛불을 켜며 영혼들을 달래던 행위는 인간이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예의였다. 비록 총칼 앞에서는 무력한 소년이었을지라도, 그 마음만큼은 어떤 거대한 폭력보다 단단했다. 작가는 인간의 잔혹함을 낱낱이 보여주면서도, 그 잔혹함에 맞서는 인간의 연한 부분, 즉 양심과 사랑의 힘을 포기하지 않는다.

진수가 죽기 전 느꼈던 “자신만이 깨끗한 무엇”에 대한 감각, 타인을 위해 주먹밥과 피를 나누던 광장에서의 기억들은 인간이 짐승이 아님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들이다. 비록 그 결과가 죽음과 파괴였을지라도, 그 순간의 빛은 영원히 썩지 않고 소설 속에 고스란히 피었다.



■ 학살의 방관자가 된 김진수, 그를 죽음으로 내몬 거룩한 부채


계엄군의 총구 앞에서 두 손을 들고 계단을 내려오던 아이들의 무구한 뒷모습은, 김진수에게 생존의 희망이 아닌 영원히 닫히지 않는 지옥의 문이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던 그의 지침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한 최선의 자비였으나, “영화 같다”라며 방아쇠를 당긴 국가 폭력의 광기 앞에서 그 자비는 처참한 살인 공모로 변질된다. 아이들의 순수한 신뢰가 선혈 낭자한 주검으로 치환되는 순간, 김진수의 영혼에는 타인의 선의를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파괴적인 도의적 죄책감이 회복 불가능한 낙인으로 새겨진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 ‘나 때문에 죽었다’라는 자책이 일상을 잠식하고, 거울 속에 비친 얼굴에서 아이들을 죽인 계엄군의 그림자를 발견할 때마다 그는 자신을 난도질했을 것이다. 결국 그를 자살로 이끈 심적 배경은 단순히 과거의 공포가 아니라, 무구한 죽음들 곁에서 홀로 숨 쉬고 있다는 생존의 치욕과 그날의 함성으로부터 단 한 발짝도 도망치지 못한 지독한 양심이었다.


“다섯명의 어린 학생들이 이층에서 두 손을 들고 내려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계엄군이 대낮같이 조명탄을 밝히며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소회의실 캐비닛에 숨으라고 명령했던 네명의 고등학생과, 소파에서 김진수와 짧은 실랑이를 벌였던 중학생이었습니다. 더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들은 김진수의 말대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러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저 새끼들 봐라, 김진수의 등을 밟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한발을 여전히 김진수의 등에 올린 채 그는 M16을 들어 조준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p.133



■ 그래도 꽃핀 쪽으로, 소년이 온다

소설에서 동호 어머니가 동호를 추억하는 독백은 이 모든 슬픔의 총화다. 30년이 지나도 “내 아들 살려내라”라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우리 시대의 가장 아픈 신음이다. 아들을 잃은 후에도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하는 자신의 “쇠심줄 같은 목숨”을 한탄하는 어머니의 사투리는 텍스트를 넘어 독자의 가슴에 화인처럼 박힌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를 어둠 속에만 가둬두지 않는다. 작가는 동호의 흔적을 찾아 광주의 골목을 걷는다. 그리하여 모두에게 말을 건넨다. 그래도 꽃핀 쪽에서 살아야 한다고. 이것은 무책임한 낙관이 아니다. 지옥 같은 고통을 통과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가장 눈물겨운 위로이다. 썩어가는 시신 곁에서 피어난 촛불처럼, 그 끔찍한 학살의 기억 위에서도 우리는 기어이 삶을 이어가야 하며 그 삶은 반드시 ‘빛이 비치는 쪽’, ‘꽃이 핀 쪽’을 향해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여야 한다.

『소년이 온다』는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제목처럼 소년은 지금도 우리에게 오고 있다.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이 살아남아 고통받는 이들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왜 살아있는가. 당신은 어떤 인간인가.”

이 소설을 덮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다. 문장 하나하나가 광주의 혈흔을 담았기에 우리 눈을 비비고, 그 비벼진 눈으로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고통을 응시하기 시작한다. 꽃핀 쪽으로 걸어가기 위해, 우리는 이 소년의 손을 절대 놓을 수가 없다. 소년은 오고 있다, 우리가 잊을 수 없는 무한으로. 그 소년은 영원히 썩지 않는 눈동자로 우리 곁을 지킬 것이다.



■ 문학의 문장으로 건네는 장례식


한강은 이 소설을 통해 1980년 5월, 제 이름을 불리지 못한 채 죽었거나 살아도 죽은 듯이 살았던 모든 영혼에 가장 성대하고도 정성스러운 문학적 장례를 치러주었다. 무구한 죽음들이 흘린 피와 살아남은 자들이 짊어진 치욕의 무게는 무한한 활자를 투하해도 다 담아낼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책장을 넘기며 한 줄 한 줄 그들의 고통을 내 몸의 감각으로 치환하는 고통스러운 독서를 감내해야만 한다. 작가가 직조한 문장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억울하게 끊겨 나간 생의 마디마디를 잇는 간절한 살풀이이자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거대한 애도의 물결이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이 처절한 기도는 소설 속 인물들의 절규를 넘어, 어둠의 시대를 통과해 온 우리 모두의 실존적 다짐이 되어야 한다. 죽은 자들이 산 자의 손을 잡고 빛으로 나아가길 갈구하는 이 역설적인 호소, 우리가 그날의 기억을 망각의 심연에서 건져 올려 현재의 정의로 되살려낼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제 ‘소년’은 과거의 망령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했던 인간 존엄의 상징이 되어 다시 우리 곁으로 온다. 우리는 그가 내미는 투명한 손을 맞잡고 다시는 그를 어둠 속에 홀로 두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그를 맞이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 그것만이 어린 새의 영혼으로 스러져 간 소년들에게 우리가 건넬 수 있는 유일하고도 고결한 응답이다.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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