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 설렘에서 붉은 벽돌의 감각까지: 서울 동부 도보 기행
서울이라는 도시는 참으로 묘하다. 빌딩 숲 사이로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빽빽한 나무들이 숨을 쉬고 있고, 그 숲을 지나면 또다시 거친 바위산이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젊음의 열기로 가득한 캠퍼스와 광활한 한강, 그리고 과거의 시간을 박제한 듯한 낡은 골목까지 공존한다. 4월의 어느 날, 지인들과 함께 이 다채로운 층위를 발로 직접 딛으며 걷기로 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우리의 여정은 어린이대공원을 거쳐 아차산, 건국대학교, 뚝섬한강공원을 지나 성수동에서 마침표를 찍은, 뚜벅뚜벅 삼만 보를 채웠다.
오전 10시, 어린이대공원 정문에서 모였다. 공기에 섞인 꽃내음이 오늘 기행의 서막을 알렸다. 어린이대공원은 이름 때문에 자칫 아이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곳은 서울에서 가장 울창하고 성숙한 숲을 가진 공원 중 하나다. 1973년 개장 이래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자라난 나무들은 이제 거대한 지붕이 되어 시민들을 품는다.
공원 초입에서 우리는 벚꽃 길을 기대하기에 앞서 잔잔한 수면이 매력적인 연못을 마주했다. 주변을 감싼 연둣빛 버드나무 가지는 화려한 벚꽃과는 또 다른 차분한 생동감을 주었다. 어린이대공원에서의 시작은 그렇게 설렘과 평온함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이윽고 마주한 풍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연분홍 벚꽃 나무가 구릉을 이루어 팝콘처럼 터져 가지마다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시기가 운치를 더했다.
특히 이곳은 서울의 다른 벚꽃 명소들에 비해 수령이 오래된 거목들이 많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툼하게 형성된 ‘벚꽃 터널’의 밀도감이 독보적이다. 평지에 조성된 여타 산책로와 달리 완만한 구릉지를 따라 입체적으로 피어난 꽃물결은 마치 분홍빛 파도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벚꽃 나무 아래 텐트를 치고 여유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에서는 도심의 조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공원의 화려한 배웅을 뒤로하고 우리는 두 번째 목적지인 아차산으로 향했다. 아차산은 서울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해 해맞이 명소로 유명하지만, 평소에도 산세가 험하지 않아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친근한 산이다. 아차산의 이름은 고구려 시대의 점쟁이 홍계관이 서해바다의 물고기 수를 맞히지 못해 죽임을 당할 뻔했다가, 나중에야 그가 옳았음이 밝혀져 “아차!” 하는 탄식이 쏟아졌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도착한 해맞이 광장 부근의 너럭바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자 발아래로 서울 도심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는데, 흐린 날씨 탓에 롯데월드타워와 한강 줄기가 안개 너머로 희미하게 보였지만 그 몽환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더 깊은 여운을 남겼다. 우리가 걷는 고요한 바위산 아래 저토록 치열한 삶의 현장이 일렁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고, 바위는 그저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지친 일상에 무언의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정상 부근의 평탄한 길을 걸으며 고구려 보루의 흔적 속에 깃든 역사의 숨결을 더듬어본 뒤 마주한 하산길은 아차산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암반처럼 느껴질 만큼 웅장한 바위 슬라브 구간이 나타난 것인데, 경사면을 따라 발끝으로 전해지는 바위의 단단한 촉감은 기분 좋은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발가락 끝에 힘을 주며 조심스레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내 삶의 무게를 온전히 스스로 지탱해 나가는 과정처럼 느껴져 묘한 사색에 잠기게 했다. 그 척박한 바위 틈새마다 수줍게 피어난 노란 개나리는 황량한 바위산에 강인한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하산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다정하게 응원해 주었다.
아차산의 단단한 기운을 등지고 내려와 도착한 곳은 건국대학교 캠퍼스다. 산의 거친 매력과는 전혀 다른, 정돈되면서도 활기찬 청춘의 공간이다. 건대 캠퍼스는 서울 안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데, 그 중심에는 거대한 호수 ‘일감호(一鑑湖)’가 있다. ‘일감(一鑑)’이라는 이름은 주자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한 개의 거울처럼 맑은 빛”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학문을 닦는 학생들이 맑은 호수처럼 늘 자신을 비추어 보고 정진하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실제로 마주한 일감호는 이름 그대로 주변의 풍경을 맑게 담아내고 있었다.
호숫가를 따라 길게 가지를 늘어뜨린 수양벚꽃은 수면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은 호수 위를 부유하며 장관을 연출했다. 학교의 상징인 우직한 황소상 앞을 지나며 우리는 잠시 그 시절의 푸르름을 떠올렸다. 현대적인 고층 건물과 오래된 나무들, 그 사이를 움직이는 시민들이나 젊은 학생들의 모습은 기행에 새로운 활기를 더해주었다.
캠퍼스의 낭만을 뒤로하고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뚝섬한강공원으로 이어졌다. 좁은 도심의 길을 지나 시야가 갑자기 확 트이며 거대한 한강 줄기가 나타날 때 느끼는 그 해방감은 이 코스의 백미다. 한강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계절마다 그리고 시간마다 그 표정이 다르다. 거대한 청담대교의 교각이 수면 위에 묵직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강변 산책로를 따라 이어지는 노란 개나리 울타리는 강렬한 생동감을 뿜어냈다. 뚝섬의 랜드마크인 유선형의 은빛 몸체 ‘자벌레(서울생각마루)’는 미래적인 느낌을 주며 주변 경관과 묘하게 어우러졌다.
우리는 강변 벤치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에 잠겼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물결을 보고 있으면 복잡했던 생각들도 함께 흘러가는 것 같다. 강물 위에 떠 있는 수상 레저 시설의 화려한 광고판들이 도심의 활기를 일깨워 주었지만, 그조차도 드넓은 한강 앞에서는 작은 점에 불과했다. 한강의 너른 품은 아차산에서부터 이어진 긴 여정의 피로를 시원하게 씻어주었다.
기행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도착한 곳은 서울에서 가장 뜨거운 동네, 성수동이다. 이번 나들이의 메인 테마 중 하나였던 이곳은 과거와 현재가 쉼표 없이 흐르는 공간이다. 과거 구두 공장과 인쇄소가 즐비했던 투박한 골목길은 이제 전 세계의 트렌드를 이끄는 예술가와 브랜드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성수동의 매력은 단연 ‘공존’에 있다. 세월의 때가 탄 낡은 붉은 벽돌 건물 안에는 가장 세련된 인테리어의 카페가 들어서 있고, 거친 철제 셔터 위에는 감각적인 팝업 스토어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사진 촬영보다는 눈으로 담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에 집중했던 성수동의 거리는 발길 닿는 곳마다 영감을 주었다.
우리는 성수동 특유의 거친 질감을 간직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오늘 우리가 걸어온 길을 복기했다. 어린이대공원의 분홍빛 설렘, 아차산의 견고한 바위, 건국대의 맑은 호수, 한강의 시원한 바람, 그리고 성수동의 감각적인 공기까지. 서울 동부의 사계(四季)를 단 하루 만에 모두 경험한 듯한 풍성한 여정이었다.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지층을 한 겹씩 벗겨내며 무려 3만 보를 뚜벅뚜벅 내디뎠던 이번 도보 기행은 우리에게 도시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었다. 차를 타고 지나갈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길가의 작은 들꽃, 바위의 미세한 결, 호수 위를 떠도는 벚꽃 잎의 궤적을 우리는 오직 걷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속도로 목격했다. 이번 코스는 자연(대공원, 아차산)에서 인문(건대), 다시 자연(한강)을 거쳐 현대 문화(성수동)로 이어지는 하나의 완성된 서사였다.
서울은 멀리 떠나지 않아도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과 이야기가 충만하다. 벚꽃이 지고 푸른 잎이 돋아나듯, 우리의 일상도 오늘 우리가 묵묵히 걸어온 그 길처럼 매 순간 새로운 색채로 채워지기를 기대해 본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3만 보의 걸음이 발바닥에 남긴 기분 좋은 통증은 오늘의 기억이 휘발되지 않게 붙잡아 더 오래도록 간직하게 해줄 것 같다. 다음번에는 또 어떤 길 위에서 서울의 새로운 얼굴을 마주하게 될까. 벌써 다음 기행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