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떼아뜨르 봄날' 연극 <이혼 고백서>

박제된 인형을 거부한 나혜석, 불꽃의 독백

by 가다은


박제된 인형을 거부한 나혜석, 불꽃의 독백



성북로 지하의 여행자극장에서 막을 올린 극단 떼아뜨르 봄날의 연극 <이혼 고백서>는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신파조의 통속적인 연애담이 아니다. 이 극은 1930년대라는 견고한 가부장적 질서의 벽을 자신의 생(生)으로 들이받았던 예술가 나혜석의 기개를 복원해 내는 처절한 기록이자, 현대 관객에게 던지는 날 선 질문이다. 약 100분간의 러닝타임 동안 무대 위에는 한 여성을 파멸로 몰아넣은 스캔들이 아니라, 시대의 제약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했던 한 인간의 숭고한 저항이자 자기 고백서가 일렁인다.



■ 시대의 문법을 해체하는 서사적 화자의 안내


극의 문을 여는 것은 나혜석의 눈물이 아니다. 극의 주요 지점마다 등장하는 사회자 혹은 변사처럼 능글능글한 멘트다. 관객이 나혜석의 비극에 과도하게 몰입해 감상주의에 빠지려는 찰나, 이들은 냉철하게 역사적 사실을 환기해 주기도 한다. 1921년 경성일보사 전시회의 압도적인 성과, 그리고 남편 김우영의 덕이라는 세간의 홀대를 건조하게 교차시키며, 관객들에게 나혜석이 마주했던 시대의 벽을 실제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게 돕는다. 이러한 연출적 장치와 흐름으로 이 극을 단순한 관람 행태가 아닌, 관객이 직접 역사의 배심원이 되어 참여하는 비평적 무대로 격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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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들의 열연: 1인 다역과 코러스의 완벽한 앙상블


이번 연극의 에너지는 배우들의 초인적인 열연과 그들이 쏟아내는 압도적인 대사의 양에서 뿜어져 나온다. 나혜석 역의 조혜선은 방대한 원전 텍스트를 정교하게 체화하여 시대적 소명 의식과 한 인간으로서의 결기를 담아내는 긴 독백을 압권으로 그려내는데, 이는 박제된 역사를 현재 진행형의 투쟁으로 탈바꿈시키는 강력한 문법이 된다.


남편 김우영의 존재감 역시 묵직하며, 배우 송흥진은 그녀를 향해 쏟아내는 긴 사랑 고백으로 당대 지식인이 지녔던 진심과 그 이면에 숨겨진 시대적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며 서사에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한 시대를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했던 여성 예술가의 외침과 그를 붙잡으려 했던 남성의 뜨거운 고백이 충돌하며 빚어내는 이 밀도 높은 언어의 향연을 선사한다.


또한 인상적인 것은 1인 2역 이상을 종횡무진 소화하는 배우들의 변신이다. 방금까지 나혜석을 찬양하던 친구나 지인이 순식간에 그녀를 비난하는 대중으로 돌변하고, 다시 파리의 예술가로 변모하는 과정은 지루할 틈 없는 전개를 선사한다. 여기에 극단 떼아뜨르 봄날 특유의 코러스 배합이 빛을 발한다. 배우들이 집단으로 내뱉는 구호와 정제된 움직임은 나혜석을 옥죄는 거대한 사회적 압력을 시각화하고 청각화한다.


■ 파리의 밤, 시그니처(Signature)로 박제된 거장들


극 중 나혜석과 최린이 파리의 밤거리를 걷는 장면은 이 연극의 백미 중 하나다.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한 예술계를 주름잡았던 거장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각자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인 시그니처를 극대화한 분장으로 실소를 자아낸다. 입체주의의 시각적 리듬을 형상화한 듯한 무늬의 티셔츠를 입은 인물, 근대적 우아함의 정수인 진주 목걸이에 도도한 여성이 세련미를 뽐내고, 초현실주의적 광기를 집약해 놓은 듯 기묘하게 풍부한 콧수염이 시선을 강탈하고, 야성미를 물씬 풍겨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문학가를 마주할 때이다.


연출은 나혜석이 이방인으로서 만끽했던 자유와 설렘을 유쾌하게 재현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날카로운 시대적 풍자를 내포한다. 특정 기호로 박제된 채 등장하는 거장들의 희화화된 모습은 관객에게 실소를 자아내지만, 이는 단순한 코미디를 넘어 나혜석을 단지 ‘신여성’ 혹은 ‘부정한 여인’이라는 단편적인 라벨로 낙인찍으려 했던 조선 사회의 천박한 시선을 역설적으로 비판한다.


나혜석에게 파리는 숨 쉬는 예술의 땅이자 해방의 공간이었으나, 정작 그곳에서 만난 ‘민족 대표 33인’ 최린이 훗날 보여준 변절과 이중성은 그녀가 갈망했던 예술적 이상이 현실의 비정한 라벨링(Labeling) 사이에서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결국 무대 위 거장들의 우스꽝스러운 형상은 나혜석의 숭고한 열망과 그녀를 파괴하려 했던 시대적 괴리 사이를 파고드는 연출적 장치인 셈이다.


파리의 예술가들이 소개되기 전에 과연 누구인지 미리 짐작해 보기 바란다. 그들의 익살스러운 몸짓에 실소를 터뜨리는 과정은, 관객에게 이 연극이 선사하는 감각적이고도 영리한 관람 포인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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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처첩을 몇 명씩이나 거느리면서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라니까요! 여자도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내가 인형이었을 때, 나는 행복했노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인형이 아닙니다. 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며, 내 삶의 책임을 지는 인간이고 싶을 뿐입니다.”

■ 기타와 보컬, 그리고 ‘블루라이트 요코하마’


음악은 이 연극의 보이지 않는 주인공이다. 엄태훈 음악감독의 라이브 기타는 건조하면서도 날카롭게 극의 마디를 베어낸다. 장정윤 배우가 부르는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는 나혜석의 근대적 자아와 낭만이 가부장제의 제약된 현실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불꽃을 상징한다. 60년대 일본의 모던함을 담은 이 선율이 30년대 경성의 비극 위에 얹힐 때, 관객은 나혜석이 꿈꿨던 자유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외로운 투쟁이었는지를 감각적으로 체감한다.



■ 기개가 담긴 예술적 저항


연극 <이혼 고백서>는 나혜석을 비련의 주인공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이광수, 염상섭 등 당대 내로라하는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도 그들의 이중성과 타협하지 않았던 기개를 담아내는 데 주력한다. 최린의 친일적 행각과 이기적인 변절을 역사적 사료에 근거해 차분히 짚어내는 서사적 화자의 멘트는, 나혜석이 겪은 고통이 단지 개인의 감정 문제가 아니라 구습과 근대가 충돌하며 발생한 역사적 산물임을 보여준다.


비록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했을지언정, 무대 위 나혜석은 결코 패배자로 보이지 않는다. 병마와 싸우는 마지막 몸의 전율은, 기어이 펼치지 못한 생의 활기가 여한으로 남는 듯하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 책임마저 온전히 짊어지려 했던 존엄한 예술가의 초상이다. 관객의 지성과 감성을 동시에 타격하는 이 작품은 2026년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당신은 인형인가, 사람인가”라고 묻고 있는 듯하다.


100분의 시간 동안 관객은 실소와 전율을 오가며, 박제된 역사 속의 나혜석이 아닌 피와 살이 도는 뜨거운 인간 나혜석을 만나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연극이 가진 힘이자, 극단 ‘떼아뜨르 봄날’이 나혜석의 고백서를 다시 펼쳐 든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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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정보]


공연장소: 여행자극장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


공연 기간: 2026.04.09~04.19


주요 곡: 블루라이트 요코하마 (노래: 장정윤 / 기타: 엄태훈)



나혜석 <이혼 고백장>


발표 시기: 1934년 8월호 및 9월호


매체: 종합 잡지 『삼천리(三千里)』


원제: 「이혼 고백장(離婚 告白狀) - 청구 씨에게」


참고: 당시 나혜석은 8월호에 먼저 글을 실었으나, 워낙 방대한 양과 파격적인 내용으로 인해 9월호까지 이어서 연재 형식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최초 개인 전시회의 시기와 성과]


시기: 1921년 3월 19일~3월 20일 (단 2일간)


장소: 경성(서울) 경성일보사 내 내자(內子) 휴게실


흥행: 이틀 동안 약 5,000명의 관람객이 운집. 당시 경성 인구를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인파.


판매: 전시된 유화 70여 점 중 상당수가 고가에 매매. 특히 기록에 따르면 그림 판매 수익으로 당시 집 한 채 값을 훨씬 상회 하는 거액을 벌어들였다고 함.


의의: ‘여성도 예술가로서 자립할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현실로 증명한 사건. 서양화라는 낯선 장르를 조선 대중에게 각인시킨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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