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요새에서 걸어 나온 은둔자의 찬란한 오답 노트
[도서 리뷰] 헨드릭 흐룬 『오로라를 따라간 푸트만스 씨』
네덜란드의 국민 작가 헨드릭 흐룬은 인생의 가장 어두운 단면을 가장 가벼운 문장으로 요리할 줄 아는 작가다. 그의 신작 『오로라를 따라간 푸트만스 씨』는 중년의 고독과 상실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유쾌한 인간미가 가득하다. 작가는 거창한 비유나 철학적인 설교를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상실을 마주한 주인공이 어떻게 그 슬픔을 견디고 다시 세상 밖으로 한 발 내딛는지를 아주 세밀하고 위트 있게 그려낸다. 독자는 주인공의 엉뚱한 행동에 실소를 터뜨리다가도, 문득 그 안에 담긴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인 외로움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오로라의 여운을 조용히, 천천히 음미했다. 그간이 긴장이 풀리며 안도감과 만족감이 찾아왔다. 지고 있던 짐을 내려둔 것 같았다. 이 모든 고생과 인내가 헛되지 않았다. p-208
동화처럼 신비로웠던 오로라가 펼쳐진 밤을 떠올리자 마음 깊숙이 충만한 만족감이 들었다. p-285
주인공 회르트 푸트만스는 평생을 숫자의 요새 안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마흔일곱 살의 미혼남인 그는 자신의 키와 몸무게조차 반올림의 유무를 따져가며 정확히 기록할 만큼 강박적이고 규칙적인 삶을 지향한다. 창백한 얼굴 위로 붉은 포도주 얼룩 같은 반점을 지닌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름과 외모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던 상처를 안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예측 불가능한 세상보다는 명확하게 떨어지는 숫자의 세계를 더 신뢰하게 되었다.
그에게 숫자는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마음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침울함이 찾아올 때마다 그는 숫자와 씨름하며 마음을 다잡았고, 불안할 때면 비상용으로 챙겨둔 고난도 스도쿠 책을 펼치곤 했다. 25년 넘게 회계사로 일하며 어떤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변화보다는 안정을, 모험보다는 계산된 통제를 선택해 온 은둔자 그 자체였다.
헤르트는 웃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도착 시각이 불확실해질수록 그는 점점 더 긴장했다. …… 예상 도착 시각을 계산하고 또 계산했다. 그리고 매번, 그 시각은 조금씩 늦춰졌다. p-258
그런 회르트의 삶에서 숫자로 치환되지 않았던 유일한 변수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이자 가장 중요한 대화 상대였다. 하지만 유난히 아름답던 5월의 어느 오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평생을 의지해 온 거대한 우주가 사라진 뒤, 회르트는 자신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좋아하던 그림조차 마음대로 그려지지 않고 삶의 루틴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절망의 끝에서 그를 다시 움직이게 한 것은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권유였다. 사실 어머니와의 약속은 단지 여행에 대해 알아보겠다는 것뿐이었지만, 회르트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그는 10월에서 2월 사이 오로라를 볼 확률이 90퍼센트라는 통계적 수치에 설득당해 노르웨이 트롬쇠로 향하는 버스 여행을 예약한다. 달력에 10월 14일 토요일을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하며 그는 113일간의 철저한 준비에 들어간다.
그는 오로라를 보았고, 어머니에게 했던 약속도 지켰다. 이제 만족할 수 있었고, 더는 바랄 게 없었다. p-282
회르트에게 이번 여행은 생애 가장 큰 도전이다. 그는 비행기 공포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들과 좁은 버스 안에서 며칠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식은땀을 흘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출발 당일, 예정된 무료 커피가 준비되지 않은 사소한 변수에도 그는 분노를 느끼며 시작부터 이 모양이라며 투덜댄다. 여행 내내 회르트는 자신만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버스의 좌석 이동 규칙 때문에 낯선 이와 짝이 되어 앉아야 할 때면, 상대의 팔이 닿는 것을 피하고자 창가 자리를 고수하며 불편함을 견딘다.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과 참견이 시작되면 재빨리 헤드폰을 끼고 자신만의 세계로 숨어버리기도 한다. 특히 유쾌한 척하며 분위기를 주도하려는 암스테르담 사람들의 허세는 그에게 견디기 힘든 고역이다. 식사 시간마다 들려오는 타인의 쩝쩝거리는 소리는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놓는다. 회르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왜 사람들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여행을 오는지, 왜 직접 눈으로 풍경을 즐기기보다 나중에 남들에게 보여줄 사진을 찍는 데만 집착하는지 말이다. 그는 엉터리로 찍힐 사진의 개수를 수천 장 단위로 계산하며 그들의 무신경함을 비웃는다.
여행은 회르트의 철저한 계산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오로라 투어가 예정된 날, 트롬쇠의 하늘은 흐렸고 그는 그토록 기다렸던 초록빛 춤을 보지 못한다. 베버르베이크의 평범한 하늘과 다를 바 없는 모습에 그는 깊은 실망과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완벽한 계획이 어긋난 지점에서 새로운 감각들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오로라를 놓친 뒤 찾아온 눈부신 북유럽의 풍경, 햇살과 구름이 교차하는 피오르의 아름다움은 굳어 있던 그의 마음을 조금씩 달래준다. 평생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며 그는 분노를 내려놓는다.
무엇이 그를 깨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눈을 떴을 때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창밖으로 평생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하늘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짙푸른 밤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물결처럼 춤추는 …… p-207
그리고 모두가 잠든 날 새벽, 마치 신의 선물처럼 창밖으로 거대한 물결 같은 오로라가 펼쳐진다. 15분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는 깊고 진한 만족감을 느끼며 그간의 긴장을 내려놓는다. 또한 그는 타인이라는 변수를 무조건 차단하는 대신 아주 조금씩 그들의 체온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때로는 혼자만의 산책을 즐기며 낯선 이들 사이의 완전한 무(無)가 주는 평온함을 만끽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서툴게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규칙적인 생활과 샤워 루틴을 스스로 깨뜨리기도 하고, 버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겨보기도 하면서 그는 숫자로 만든 성벽에 작은 창을 내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고립을 자처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했던 현대인의 초상을 회르트라는 인물을 통해 절묘하게 보여준다. 과거의 문학 속 은둔자들이 어떤 예술적 강박이나 폐쇄성을 통해 세상과 절연했다면, 회르트는 ‘숫자’라는 가장 명징한 도구를 성벽 삼아 자신을 가두었다. 1센트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그의 기능적 호흡은 타인과의 접촉을 거부하는 현대적 은둔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 헨드릭 흐룬은 이 지독한 결벽의 성채를 무너뜨리기 위해 ‘어머니의 유언’과 ‘단체 버스 여행’이라는 가장 비효율적이고 인간적인 변수를 투입한다. 혼자였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이 서사는 좁은 버스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과의 마찰과 예기치 못한 날씨의 변화를 통과하며 냉소적인 고립을 찬란한 유머로 치환시킨다. 숫자만을 신뢰하던 한 인간이 통제 불가능한 자연의 경이 앞에 서고, 그 과정에서 낯선 이들의 서툰 배려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독자에게 묘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무엇이 그를 깨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눈을 떴을 때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창밖으로 평생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하늘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짙푸른 밤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물결처럼 춤추는 …… p-207
회르트는 마침내 오로라를 보았고 어머니에게 했던 약속도 지켰다. 동화처럼 신비로웠던 그 밤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마음 깊숙이 차오르는 충만한 만족감을 느낀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생각한다. 여행 내내 그를 짓눌렀던 타인들의 질식할 듯한 무게와 어긋나는 일정들에 대한 강박도, 오로라를 마주한 그 찰나의 순간에 모두 녹아내린 듯하다. 돌이켜보면 그는 어린 시절 수영 수업 시간만큼은 늘 행복했다. 물속에 있는 동안만큼은 세상의 어떤 시선도, 이름에 대한 놀림도 두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문득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린다. 물에 빠져 죽거나 얼어 죽는 것은 고통이 없는 죽음이라는 그 문장을 말이다.
여행의 끝자락, 회르트는 다시 한번 홀로 산책에 나선다. 낯선 이들 사이의 그 완전한 무(無)가 주는 아름다움에서, 그는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올라 숨을 쉬게 된 기분을 느낀다. 그에게 있어 인생의 오로라는 대단한 성취가 아니라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장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제 숫자의 감옥도, 타인의 시선도 없는 곳을 향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마치 어린 시절 수영장의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처럼 어떤 두려움도 없이 가장 평온한 마침표를 찍으러 가는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삶의 비극마저 웃음으로 승화시키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웃음 뒤에 숨겨진 가장 깊고 서늘한 고독의 자리를 묵묵히 응시한다. 회르트가 남긴 마지막 선택은 비극이라기보다, 평생을 숫자의 요새에 갇혀 살던 한 남자가 비로소 자신에게 허락한 가장 찬란하고 자유로운 정답(아무리 오답일지언정)일지 모른다.
언젠가 책에서 얼어 죽는 건 고통 없는 죽음이라고 본 적이 있었다. 물에 빠져 죽는 것도 그렇고.
p-199
옆 난간에는 구명부환이 하나 걸려 있었다. …… 누군가 바다에 떨어졌다고 가정하자. …… 그러니까 만약 바다에 떨어지거나 뛰어내리면,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p-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