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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원 Jul 12. 2016

여행이 뭣이 중허냐고 묻는 당신에게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마치 가이드북처럼 여행을 떠나기 전 어떤 곳을 들러야 재밌게 놀다 올 수 있을까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이번 하루키의 여행기는 살며시 내려놓는 것이 낫다. 대부분의 여행 에세이가 그렇듯, 이 책은 우리에게 '유용한' 정보는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자고 우리(란 나와 아내를 말한다)는 그리스의 섬에 살기로 해놓고 이렇듯 절대 매력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계절을 골랐는가? 일단 무엇보다 생활비가 적게 들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에게는 물가와 임대료가 비싼 성수기에 그리스 섬에서 몇 달씩 생활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또한 비수기의 섬은 비록 날씨는 안 좋지만 조용히 일에 몰두하기에 적합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여름철의 그리스는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소란스럽다. 당시 나는 일본에서 일하는 데 지쳐, 외국에 나가 성가신 잡무를 피해서 조용히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진득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긴 소설도 써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동안 일본을 떠나 유럽에서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p89


이 책에 알맞은 사람들은 언젠가-그 시기조차 명확하지 않은 막연한 미래-훌쩍 여행을 떠날 것이라 기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먼 미래까지 기다림에 지치기 전, 하루키는 우리에게 여행자가 느끼는 분위기를 선물해준다. 

이번 책 속 여행이 다른 여행들보다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바로 하루키가 과거에 오랜 기간 머물렀던 곳을 다시금 방문한 이야기가 많다는 점이다. 한때는 삶의 터전이었던 곳을 방문하는 여행기에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한 향취가 있는데, 우선 관광객들이 방문하기 힘든 장소에 대한 기억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한번 스쳐가기 때문에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모습이 아닌 오래도록 보고 느껴왔기 때문에 정이든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나도 그곳에서 몇 년쯤 살다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아이슬란드에서 몇 년쯤 살아본 기분은 얼마나 근사한지.


한때 주민의 한 사람으로 일상생활을 보내던 곳을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여행자로 다시 방문하는 기분은 제법 나쁘지 않다. 그곳에는 당신의 몇 년 치 인생이 고스란히 잘려나와 보존되어 있다. 썰물이 진 모래사장에 찍힌 한 줄기 발자국처럼. 선명하게. -p185


하루키 에세이의 미덕은 작가 본인의 위치에 불구하고 결코 놓치지 않는 그만의 소박함이다. 요즘 유행하는 에세이처럼 한 페이지를 가득 메운 아름다운 사진을 이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도시마다 한 장씩-그것도 모든 여행에 있는 것은 아니라 행운처럼 기다려야 찾을 수 있는-인터넷 광고 배너보다 작은 크기의 사진 속에 그야말로 동네 아저씨처럼 소탈한 차림의 하루키가 싱긋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내 마음도 차분해진다. 그런 화려한 사진 한 장 없어도, 하루키의 글은 그 어떤 사진보다 생생하여 한번 다녀온 적 없는 장소도 이미 가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인기 많은 하루키를 시샘하듯 외면해오다 우연히 읽게 된 에세이에 마음을 뺏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읽을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것이 그의 에세이라, 리뷰를 쓸 때마다 반복되는 미사여구에 머쓱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하루키가 끊임없이 재즈와 달리기, 그리고 여행을 사랑하듯 나 역시 담백하고 긴 호흡으로 그의 에세이를 언제까지나 즐기고 싶다. 그럼,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여행하는 하루키의 마인드를 적으며 나는 또 하루키의 다른 책을 읽으러 가야겠다(!)


"라오스(같은 곳)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베트남 사람의 질문에 나는 아직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라오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는, 소소한 기념품 말고는 몇몇 풍경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러나 그 풍경에는 냄새가 있고, 소리가 있고, 감촉이 있다. 그곳에는 특별한 빛이 있고, 특별한 바람이 분다. 무언가를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다. 그때의 떨리던 마음이 기억난다. 그것이 단순한 사진과 다른 점이다. 그곳에만 존재했던 그 풍경은 지금도 내 안에 입체적으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꽤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풍경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가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결국은 대단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한낱 추억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래 여행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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