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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원 Jul 23. 2016

휴가철에 만난 디스토피아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응당 '바캉스'를 떠나야 하는 것이 옳은 시기, 일과 사람에 치여 떠나지 못한 자들이 남은 사무실에는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만 적막을 부순다.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 이 시기에 디스토피아 소설인 <멋진 신세계>를 집어 들게 된 연유는 뭘까. 더운 여름을 화를 돋워 극복하자는 '이열치열'의 대책을 세운 것도 아닌데.


고전은 아무리 귀동냥으로 줄거리를 알고 있어도, 직접 읽으면 충격을 경험하게 되는 매력이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상상만으로도 죄가 될 것 같은 사악한 사회를 한 자 한 자 글자를 통해 그려낸다.  이 새로운 세계의 아기들은 태어났을 때 정해진 등급에 의해, 누군가는 알파 플러스로 분류되어 사회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인재가 될 수 있도록 최고의 환경 아래에서 성장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감마나 오메가로 분류된 후, 적당히 '멍청'해서 노동력에만 도움이 되고 다른 심오한 생각은 하지 못하도록 뇌에 산소 공급을 저하시킨다거나 아름다운 것을 보고 거부 반응을 일으키도록 교육받고 자란다.



어렸을 때뿐만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도 통제는 계속된다. 그 세계의 구성원들은 관습화 된 행복을 만끽하고-태어났을 때부터 행복을 각인당하고, 마약 성분의 소마(SOMA)를 섭취하며-살아가는 것을 보면 진정한 행복과 삶이란 어떤 것일까 다시금 고민하게 만든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와 행복을 추구한다고 느끼지만 사실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카테고리는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다. 여행, 쇼핑, 문화생활, 스포츠, 아니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한적한 전원생활. 우리가 원하는 이상향은 대부분 미디어에 노출된 이미지와 비슷하다. 그리고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럴싸하고 멋진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은 다른 방법으로 행복해지는 자유를 누리고 싶지 않나요, 레니나?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당신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말이에요. -p152


행복의 교과서, 혹은 참고서처럼 비슷한 모습의 '이미지'를 강요당하는 삶이 결코 '멋진 신세계'보다 나은 세계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 세계든 이 세계든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은 노예가 되어 무언가에 현혹된 채 열심히 노동을 바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 마이 갓' 대신 '오 마이 포드(자동차)'를 외치는 이토록 멋진 신세계는 사회 전체적으로 기술문명에 대한 찬양이 흘러넘친다. 하지만, 인간이 늙어가는 것을 추하게 생각하고, 진지한 영화를 보는 대신 생생하게 감각이 느껴지는 촉감 영화에 빠지고, 고민 같은 건 잊어버리고 언제든 소마 한두 알을 삼켜 환각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그 찬양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한 세기쯤 지난 여기, <멋진 신세계>보다 더한(?) 사회가 있다. 현대 사회에선 굳이 유전자 변형 없이도 태어나는 순간 부모의 지위에 의해 '수저'를 물고 태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흙수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금수저, 은수저, 다이아몬드 수저를 언급하며 씁쓸히 웃어넘기는 것뿐이다. 심지어 SNS의 발달로 인해 흙수저 들은 적극적으로 금수저들의 생활에 대해 자유롭게 관찰하면서 생활수준의 차이를 극명하게 체감하며, 자신의 인생을 얼마쯤 포기한다. 이런 사회를 과연 소설 속 '멋진 신세계'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1984의 '스미스'도 멋진 신세계의 '존'도 결과는 차치하더라도, 그들이 사는 더러운 세상에서 최선의 반항을 하는데, 스미스와 존의 가운데에 낀 세대인 우리는 일을 하다가 휴가를 가고 싶을 때,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껏 향할 수 없는 이 상황을 너무나 순순히 받아들이고만 있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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