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나의 본업은 소설가요, 내가 쓰는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세상에는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밖에 안 마셔"하는 사람도 많으니 물론 적당히 쓸 수는 없죠. 일단 우롱차를 만들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만들겠다는 것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나 뭐,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는 어깨 힘 빼고 비교적 편안하게 이 일련의 글을 썼습니다. 어깨 힘 빼고 편안하게 읽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 p7
이렇게 사랑스럽게 시작하는 글을 보고 어떻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책을 펼침과 함께 흐뭇한 미소가 베어 나와 기분 좋게 독서를 시작할 수 있었다. 2주 동안 틈틈이 읽었던 그의 에세이는 내게는 쉬는 시간 같은 것. 삶에 치여있을 때마다 이 에세이를 읽기 위해 집에 돌아오는 걸음이 빨라졌다. 침대에 삐딱하게 누워서 발을 까딱거리며 이 책을 읽는 것이 2주 동안 내가 선택했던 쉼 중에 가장 쉼 다운 것이었다.
그의 에세이 속 이야기는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간다. 그야말로 신변잡기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처음부터 어떤 얘기를 하다가, 마지막 문장에 돌연 전혀 딴소리로 마무리되기 일쑤다. 그가 이 글을 쓸 때는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구나 생각하며 흥미를 느낌과 동시에 '역시 갑자기 딴생각이 나서 말 돌리는 건 나나 무라카미 하루키나 마찬가지군' 생각하며 킥킥거리고 웃게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에세이를 좀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세이를 교훈적으로 쓰려 애쓰지 않는다. 교과서에서 읽었던 전형적인 에세이들은 작가의 생활과 그 생각을 통해서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에세이의 주제는 명확하게 무엇이다 말할 수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는 다르다. 하나의 글을 읽고서는 도대체 이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권을 읽고 나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 해 조금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쓰는 글에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왠지 전보다 더 편한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던 것 같다.(이것이 그의 목적이었나?)
이처럼 그의 글은 읽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쓰는 즐거움도 배가시켜준다. '쓰는 것이란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단치 않은 일에도 우리는 즐거움을 느끼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다.
글을 통해서 남의 생각과 기분을 들여다보는 것은 꽤나 재미있는 일이다. 마치 유튜브로 먹방을 보는 것처럼 별 내용은 없지만 홀린 듯이 보게 되는 매력이 있는 것이다.
유려한 문체로 무언가를 화려하게 표현하는 문장을 읽을 때에도 그 나름의 읽는 재미가 있지만, 이처럼 간결한 단어의 조합으로 된 문장을 읽고 있으면 신선한 샐러드를 먹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그의 모든 글이 시시껄렁하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문장은 굳이 다시 '찾아서 읽는' 노동을 하기 위해 표시를 해두지 않을 정도로 진한 울림을 준다.
사람은 때로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그것의 무게로 제 자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음악에는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
소설에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도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워 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은 가르쳐준다.
내가 쓴 글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 p 219
무라카미 하루키는 위와 같은 사이트도 운영하고 있다.
일본어를 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에게 간단한 상담이나 하고 싶은 말을 남길 수 있는데
그에 대해 하루키는 답변을 해준다.
이 사이트 역시 그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 준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상담과 답변 중에 하나.
저는 30살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만, 현재 하나도 이루어낸 게 없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어른이란 건 참 멋지구나 라고 생각해왔습니다만,
현재의 제 모습은 그에 걸맞지 않은 기분이 드네요.
그리고 그 상황에 마음이 무너져버릴 것 같습니다.
대체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요.
Jo & Maca 여성 28세
하루키
실례되는 말이지만, 어른이란 건 멋진 것이다 라는 생각 자체가 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어른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릇입니다. 거기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는 당신의 책임이죠.
무언가를 이루어낸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히 할 수 없습니다.
조금씩 그 주변의 것들을 그릇에 넣어가는 것에서부터 모든 게 시작됩니다.
28세라니 대개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막 시작한 단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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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다음 에세이를 읽어보고 싶다. 매 끼니를 먹는 것처럼 매일매일을 그의 에세이와 함께 하고픈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