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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원 Jun 02. 2019

선이 없었는데요, 있었습니다

영화 <기생충>

* 이 글에는 영화 <기생충> 스포일러가 다수 존재합니다. 



* 이 글에는 영화 <기생충> 스포일러가 다수 존재합니다. 

* 이 글에는 영화 <기생충> 스포일러가 다수 존재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계층이 있다. 족보나 낙인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다. 아니, 존재하지 않지만 사람들의 눈에 계급이 보인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영화 <기생충>을 보고 불쾌함이 느껴지는 것은 비현실 적인 영화에서 현실 속 우리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 놓인 계급을 넘어 한차원 높은 급으로 편입되기를 원한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 대치동에서 월세로 살아가거나, 원룸 월세에서 살지만 외제차를 몰거나, 부자 친구들 근처를 기웃거리며 더 많은 부자친구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은 편입에 대한 노력 중 하나이다. 그 노력(?)을 영화 속 박사장은 '선을 넘는다'고 이야기하고, 기택네 식구들은'계획'이라고 말한다.


이런 박사장네와 기택네의 계급차는 시각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박사장네 집에서 대문까지는 한참 계단을 따라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대문 앞 내리막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간 뒤 마주한 가난한 동네에서도 기택의 집은 한참 '반지하'다. 그리고 문광부부의 거처는 박사장네 집. 아무도 모르는 계단 밑 '지하'다. 





박사장네 부부는 얼핏보면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별 관심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은 대화를 나눠보면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몇단계쯤 아래로 보고있다. 박사장은 윤기사를 '감히' 내 자리에서 이상한 짓을 한 죄로 한번에 해고한다. 박사장은 기택 역시 가끔 선을 넘을듯 말듯 하다며 불쾌해한다. 박사장은 운전기사나 집사를 친근하게 대하지만 마음에 안들면 얼마든지 단번에 해고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박사장의 선긋기는 기우의 친구 민혁에게서도 볼 수 있다. 민혁은 박사장의 딸 다혜와 사귀고 싶다며,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다혜를 '지켜'달라며 고졸인 기우에게 과외를 넘긴다. 말로는 자신의 학교 친구들은 문란해서 안된다지만, 이는 결국 기우는 박사장 같은 사람들과 같은 급이 될 수 없다는 민혁의 판결문이다. 그래서 과외선생이 된 기우는 다혜에게 자신이 박사장이 연 생일파티와 어울리는지를 자꾸만 되묻고, 여동생 기정에게 이 집이 잘 어울린다며 부러워한다. 하지만, 부잣집 딸 다혜 역시 이 집에서는 가장 아래 계급일 뿐이다. 연교는 채끝살이 들어간 짜파구리를 남편과 아들에게 권하지만, 결국 다혜에게 권하지 않고 본인이 먹어치운다. 다혜의 투정에 '별 것 아닌것 가지고 그런다'며 딸을 타박하지만, 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 별 것 아닌것 같은 행동 하나가 바로 급이 다름을 보여주는 선긋기라는 것을. 



기택네 가족이 보이는 모순은 문광부부와 맞닥뜨렸을 때 나타난다. 기택과 가족들은 자신들이 박사장네 집에서 마음대로 술판을 벌이고 제집처럼 집을 쓰는 것에는 거리낌도 죄책감도 없다. 그러나 문광부부가 지하실에 살면서 박사장네와 집을 공유하고 있었던 사실에 경악한다. 그리고 문광이 감히 충숙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것을 역겨워한다.  


문광 부부가 기택네 가족을 장악한 뒤 하는 북한 아나운서 성대모사는 계급 투쟁에 성공한 프롤레타리아의 환희같다. 그리고 이 모습은 박사장네가 사라지자 마음껏 집을 사용하는 기택네 가족의 신난 모습과 겹친다.


선을 넘는다는 것이 마치 아래계급이 위를 향할 때로 한정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박사장은 평소에는 기택을 향해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다 가장 원초적인-섹스를 하거나 아들이 죽을 위기에 처한- 순간에서야 기택을 동등한 인간이 아닌 한 마리의 운전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택은 평소에는 볼 수는 없었지만, 맡을 수는 있었던 차별을 그 때 목격하고 만다. 감독은 영화에서 나쁜 사람이 없다고 한다. 오죽하면, 문광이 자신을 죽인 충숙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 그들은 그저 그들과 우리가 모두 잠재적으로 생각하던 것을 말로, 행동으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관객이 가장 좌절한 순간은 아마 기정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기정은 기택네 집에서 유일하게 그 집에 어울리는 사림이었다. 그러니까 기택의 계획을 가장 실현할 수 있는 사람역시 기정이었으나, 그는 아프다는 소리 한번을 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는다. 기우는 아버지 기택에게 자신이 그 집을 살 테니, 아버지 당신은 그저 계단만 올라오라고 전한다. 그러나 관객은 그 계획이 실현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기우의 약속으로 위로 올라가고 싶은 관객의 감춰진 계획은 모두 좌절된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본 관객을 좌절시키지만, 그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저 보이지 않는 그 선을 뛰어넘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누군가의 잠재되어있는 생각을 영화로 보여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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