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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원 Jul 08. 2019

여행도 휴가도 못 갈 때 읽는 책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 산책>


빌 브라이슨의 글이 재밌다는 얘기는 줄곧 들어왔었다.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발견하고 어떤 종류의 재미일까 궁금해하며 들춰보니 다름 아닌 '위트를 가장한 개그'였다. 진지한 리뷰글에 'ㅋ'를 남발하는 대신 내가 만약 빌 브라이슨과 카톡을 한다면 화면 가득  'ㅋ'로 도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로 그의 위트 이야기를 대신하겠다. '얼마나 재밌는지 두고 보겠어'하고 으름장을 놓고 읽다가 아래 구절에서 '빵'터져서 조용히 책을 대여해왔다.


좌석은 괴이한 각도로 기울어져 있어 당장 목이 뻣뻣해졌지만, 나는 계속 그 어정쩡한 자세로 가야 했다. 의자 옆쪽에는 손잡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걸 당기면 좀 더 편안한 자세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내심 들었다. 그러나 오랜 경험으로 봤을 때 시험 삼아서라도 그걸 건드렸다간 등받이가 뒤로 털썩 주저앉으면서, 내 뒤에 앉은 상냥한 할머니의 무릎을 으깨 버릴 것 같아 그냥 불편한 채 있기로 했다. -p15



개인적으로 이 책은 유럽여행을 한 번도 가지 않은 사람보다는 몇 개국이라도 다녀왔던 사람이 읽기를 추천한다. 이 책을 읽었다가는 가보지 않은 유럽에 대한 환상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면이 유럽 여행에 있어 오히려 안심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종종 만나게 되는 불친절한 타국의 사람들과의 추억이 오직 나만의 것이 아니라, 타임즈 기자도 동일하게 겪는 일이구나, 라면서 '모든 여행객은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빌 브라이슨에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쾰른은 음울한 도시였는데 나는 그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독일인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도시를 엉망으로 설계할 수도 있으며, 쾰른이 특히 그렇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p123

정말 음식 이름에 관한 한 독일어처럼 매력 없는 언어도 없다. 커피에 거품 낸 생크림을 얹어달라고 하려면 독어권에서는 대부분 '미트 슐라크'라는 말로 주문해야 한다. 대체 이 말이 거품이 보송보송하고 군침이 도는 맛있는 크림처럼 들리는가, 아니면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뭘 뱉어내는 소리처럼 들리는가? -p286


권하고 싶지 않기로는(갤러리) 알베르티나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입장료가 더 비싸 45실링이나 한다. 이 정도 돈이면 걸려 있는 그림 하나는 가지고 갈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p328



내가 가본 도시에 대한 그의 감상은 어떨까 기대하면서 글을 읽었다. 내가 가본 나라 중에서는 이탈리아를,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피렌체에 대한 장을 펼치기 전에 이 도시가 빌 브라이슨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기를 내심 기도하기도 했다(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는 직접 확인하시길!).

가보지 않은 나라들에 대한 챕터를 읽으면서 이 도시가 내 눈에 실제 비친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상상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전혀 관심 없던 도시에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고,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는 한 달쯤은 기간을 잡고 가야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여행 팁도 건지게 된다.


그러나 빌 브라이슨은 웃긴 이야기만을 나열하는 여행작가는 아니다. 그는 솔직한 자기반성을 통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스스로의 생각은 어떤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아직도 유럽을 한 곳을, 그리고 유럽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p114


어딘가를 방문해서 왕처럼 지낼 수 있다면, 그런 방문객에게 애로가 있다면 자신의 부가 다른 이들에게는 하인 노릇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p354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문장들을 읽으며, 유머와 진지함이 적절하게 배합된 그의 글에 점점 중독되고 있음을 느꼈다. 영국과 미국에서 그의 글을 좋아하는 팬이 그렇게 많다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나도 그 무리 중 한 명이 된 것 같다.


글을 읽으면서 내 여행의 추억 역시 특별한 경험보다는 잔잔한 풍경을 감상하는 순간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해질 무렵 올라갔던 피렌체 두오모에서 나오는 '냉정과 열정사이'의 OST를 들으며, 이런 도시라면 한 번쯤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보고 싶다 생각했던 그 순간들이 자꾸만 눈앞에서 서성였다.


아주 맛있는 초콜릿 크림 파이나 기대하지 않은 거액의 수표를 받는 일을 제외하고, 상쾌한 봄날 저녁 서서히 저물어가는 저녁 해의 긴 그림자를 따라 외국 도시의 낯선 거리를 한가하게 산책하는 일만큼 즐거운 일이 있을까? 그러다가 가끔 멈춰 서 가게 진열장을 들여다보거나, 교회, 예쁜 광장이나 한가한 부두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하면서 앞으로 오랫동안 흐뭇하게 기억할 유쾌하고 내 집 같은 음식점이 과연 길 이쪽에 있을지 저쪽에 있을지 망설이는 일은 또 어떤가? 나는 이런 일이 너무도 즐겁다. 매일 저녁 새로운 도시에 가보면서 평생을 살아도 좋겠다. (중략)그리고 나도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족이 보고 싶었고, 내 집의 친숙함이 그리웠다. 매일 먹고 자는 일을 걱정하는 것도 지겨웠고, 기차와 버스도, 낯선 사람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도, 끊임없이 당황하고 길을 잃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라는 사람과의 재미없는 동행이 지겨웠다. -p385



여행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책을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니 내가 유럽여행을 하고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낯선 세계를 경험한 직후의 흥분과 피로감에 따른 익숙한 내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혼란스럽게 섞여있었다.


그리고 한국 땅을 밟자마자 집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다음 여행을 다짐하게 되는 것처럼, 그의 다른 여행 책과 어서 빨리 만나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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