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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원 Feb 05. 2018

주관적 사랑의 순간

영화 <그녀>

*영화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유난히 사랑의 기억을 자세히 기억한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과의 첫만남이 어디였는지.

그 때 나와 그 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그날의 날씨조차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다.

좋은 카메라와 배우만 있으면

그 장면을 똑같이 재현해낼 수 있을만큼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우리는

사랑의 장면을 선명하게 기억하곤 한다.


영화 그녀(her)는 그런 영화다.

이 영화는 사랑의 flow 보다는 scene을 자세히 표현한다.

따라서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장면들이 뇌리에 박히게 만들어 버린다.

이 영화의 사랑은

타인의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이야기'가 아닌,

사랑하는 두명의 눈으로 바라보는 주관적인 '장면'이다.



테오도르가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듣고 인사를 나눌 때나,

컴퓨터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을 때,

그녀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자꾸만 질문에 질문을 거듭할 때

카메라는 사람이 걷고, 돌아다니는 듯 자연스럽게 흔들리고 빛은 항상 그들과 함께한다.


그것은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아름다웠던 시간들이

유난히 환한 장면으로 기억되는 것과 닮아있다.


이 영화를 본 뒤엔

마치 테오의 사랑을 함께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경험했던 것은 오직 사만다의 목소리 뿐이었으나,

왠지 나는 사만다의 얼굴을

몇번쯤 쓰다듬은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은 둘이하는 것.

그러니까 서로에게만 인정받으면 된다.


바깥 세상은 다른 사람의 평가로 이루어져있다.

테오의 전 여자친구 캐서린은

운영체제와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테오의 이야기에

분노하고, 맹렬히 비난한다.

그녀의 분노는 얼핏

자신의 옛사랑의 지금 사랑이 인간이 아닌

운영체제인 것에선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분노는 질투와 맞닿아있다.


그녀의 비난이 객관적인 것이라면

테오의 친구 에이미는

그리 쉽게 운영체제와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수천명의 사람들이

사만다와 행복하게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평가는 얼마나 주관적인가?

그러나 주관적인 평가가 우리를 향할 때에는

그것은 얼마나 엄격하고 객관적인 것처럼 느껴지는가.


감정은 주관적이다.

누가 뭐래도 내가 싫으면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테오도르의 편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할 때마다 격하게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테오도르가 직접 '썼'음에도 불구하고,

테오는 주변의 찬사에 쉽게 기뻐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 속에서 '대필편지'는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누가 뭐라든 내가좋으면 그 뿐이다.

테오의 내적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때는

그와 사만다의 둘의 세계 밖 사람들이

그들의 사랑을 비난할 때가 아니라,

둘만의 세계에서 그녀가 사라졌을 때,

그리고 그들의 세계에서 사만다가 안녕을 고할 때이다.

그 때 카메라는 테오의 마음처럼 강렬하게 흔들린다.



세계의 구경꾼들은 말할지 모른다.

'뭐가 저리 유난이야, 그냥 흔한 운영체제일 뿐인데'

사랑의 구경꾼들은 말할지 모른다.

'뭐가 저리 유난이야, 그냥 흔한 사랑일 뿐인데'


그러나 당사자만은 알 수 있다.

흔한 운영체제가 아니라는 걸.

흔한 사랑이 아니라는 걸.  


영화는 보여준다.

수천만명에게 평범한 os(운영체제)일 뿐인 1(one)이

한사람만의 the one으로 변하는 순간을.

그리고 말한다.

사랑을 하라고.

둘만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허물어지는 수많은 장면들을

마음껏 향유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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