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2014년 가을. 점심시간이면 나는 역삼역 2층 커피빈을 뛰어올라갔다. 지명수배를 받은 사람처럼 몸을 숨기고 혼자 커피를 마시며 여행 잡지를 뒤적였다. '네가 아니면 안 돼'라고 말하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나는 '정신이 여기 있으면 안 돼'라고 주문을 외는 직장인이었다. 여행잡지 속에서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과,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곳과, 한 번은 갔던 곳들을 헤맸다. 그리고 혼자서 꼭 오고 싶은 지역은 사진을 찍어 이곳에 가겠노라 나 자신과 몇 번이나 약속하곤 했다. 지금은 기억조차 안나는 지역이었다.
모든 여행잡지를 읽는 사람들이 이렇듯 고통스러운 순간에 잡지를 읽을까마는,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원한다는 점에서 나의 개인적인 여행잡지 탐독기는 다른 이들과 비슷한 궤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 <언젠가, 아마도>에 나오기 전, 잡지 론리 플래닛에서 먼저 만났을 김연수의 글은 '갑작스럽다'. 한두 페이지의 분량 안에서 도시의 순간을 보여주기 위해 김연수는 첫 문장부터 우리를 그 도시로 안내한다.
항공권에는 두바이 도착 시간이 새벽 4시 15분으로 나와 있었다. 연결 항공편 탑승 시각이 오전 9시니까 그때까지는 별 수 없이 공항에 갇힌 몸이라고 생각하며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웬걸, 보안 검색대를 지나 환승 구역으로 들어서자 내 예상과 전혀 다른 곳이 나타났다.
그리고 작가 김연수가 여행자의 눈으로 느끼는 도시는 생각보다 썩 로맨틱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는 대부분 혼자였고, 외로웠고, 이방인이었다.
그게 휴가라면 불행한 휴가였다. 머무는 내내 비가 내렸다. 곧 출국할 예정이었으므로 나는 차마 우산을 살 수 없었다. 매일 아침 로비에서 비 오는 거리를 바라보다가 벨보이에게 호텔 우산을 빌렸다. 호텔 우산은 무척 컸다. 그건 두 사람을 위한 우산 같았다. 그런 우산을 들고 혼자서 돌아다녔다. 북릉에서는 시멘트로 만든 왕릉을, 장쉐량 옛집에서는 격자창 바깥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봤다. 서탑 거리의 체인점에 들어가 혼자서 햄버거를 먹었다. (중략)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어쩌면 나는 그들에게 중국인 남자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고, 그랬다면 불편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때는 나도 어쩔 수 없었다. 호텔 방은 너무 외로웠으므로.
이는 여행 잡지 론리 플래닛이 원래는 노래 가사 속, '러블리 플래닛' 잘못 알아듣고 만들어진 것과 일맥상통한다. 여행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외롭지만, 그 외로움이 썩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역삼역에서 벗어났다. 그 사이, 내 하루에는 역삼역에서 겪은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순간은 지나갔다. 고통이 내 것이었는지 깨닫기 어색할 만큼 아득해져, 새옹지마를 몇 번이나 되새기는 고요 속에 있다.
이런 고요처럼 김연수의 글 역시 나를 다독여준다.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났음에도 외롭게 느껴진다면, 그냥 오롯이 외로움을 느껴도 된다고.
여행조차 갈 수 없이 현실에서 아프게 헤매고 있다고 해도
괜찮다고.
그냥 여기서 한없이 헤매도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