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소크라테스의 유무죄를 가리는 당시 배심원은, 21세기 시민들의 수준과 다를 바 없다.
여기서 수준이란 높고 낮음보다는 근본 속성이 달라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합리성과 이성에 매달린다.
그의 모습은 자신이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중요시하는 철학과 합리성은 사회와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한 가지 일뿐,
인간과 사회 그 자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합리성과 이성 그 자체이길 바랐다.
그의 열망이 옳고 그런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듯 인간은 누구도 완벽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사람과 나는 훌륭함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점에서는 똑같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대단한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결국 내가 이 사람보다 현명한 것이구나."
소피스트들은 불완전한 인간을 이용하여 이익을 챙긴 반면, 소크라테스는 인간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했다.
소크라테스의 바람처럼 인간을 좀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수십 세기 전 쓰인 고전문학이 아직도 우리의 삶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정신적으로는 2천여 년 전과 다를 것이 없다는 반증이다.
최근의 많은 행동경제학자들 역시 인간의 비합리적 선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인간은 이러한 불완전함으로 인해 서로에게 공감해왔다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이 말했듯 행복은 배타적이지만 불행은 끌어안는 속성으로 사람들은 자기 주변, 또는 이야기 속 비극에 깊이 공감하고 연민을 느낀다.
소크라테스가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고 말했듯,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 불완전함은 합리성과 이성적 측면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불완전한 사람들은 누군가 답을 내려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별자리와 사주를 믿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따르며 논조가 있는 미디어를 찾는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합리적인 생각 대신 믿음을 얻는다.
소크라테스가 우려한 것은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타인-소피스트 같은-의 선답을 듣고 맹목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다.
당시 권력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권력이 약해질까 두려워 소크라테스를 고발하고 죽음으로 이끈 점 역시 현대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적개심을 갖게 된 것은
내가 이처럼 끈질기게 문제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수많은 비방을 받으면서도 현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소크라테스처럼 살 수는 없다.
그런 삶이 옳고 그른지를 떠나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질문으로 맹목적인 믿음과 권력을 경계해야 된다는 측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그 자체로 수십 세기를 뛰어넘는 가치가 있다.
자, 이제 떠날 시간입니다.
나는 죽기 위해, 여러분은 살기 위해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 누가 더 나은 쪽으로 갈 것인지는 신밖에 모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