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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섭 Mar 29. 2019

울버린을 체험케 하는 <로건>

울버린은 능력에서 다른 히어로들과 차별되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히어로들, 특히 영상화된 이들의 경우 물체를 이동시키고 뭔가를 발사하는 것이 주 능력이지만, 울버린이 가진 것은 손톱이다. 다른 히어로들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싸우는 반면 울버린-로건은 적 바로 앞까지 접근해 찌르거나 베고 눈앞에서 철철 흐르는 피를 목격해야만 한다. 만화로서 정지해있는 이미지인 마블 코믹스가 영화로서 살아 움직이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엑스맨 실사영화 시리즈로 재매체화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싸움의 대가는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는데, 특히 <로건>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래도 기존 <엑스맨> 시리즈나 <울버린> 시리즈에서 감독과 카메라가 적당히 수위를 조절해주는 필터 역할을 했다면, <로건>에서 제임스 맨골드는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관객은 로건이 적의 몸을 손톱으로 관통하고 피칠갑을 만드는 장면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직시하게 된다. 그가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데드풀>에서 웨이드 윌슨이 피가 묻은 옷을 빨래하는 게 번거로워서 빨간 수트를 입게 되는 것과 대조되는데, 여기서는 원작과 영화가 데드풀의 가볍고 유머러스한 캐릭터를 유지하기 위해 관객에게 적나라하게 피로 범벅된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피하려 한 듯한 느낌이다. 또한 이전 작에서 울버린의 상처도 힐링 팩터 설정을 이용해 상처가 즉시 치료됐다는 이유로 생략 가능했다. 반면 <로건>에서는 로건에게 굳이 하얀 민소매를 입혀 옷에는 총에 맞은 핏자국, 옷 밖으로 드러난 부분은 X-24의 손톱에 맞은 핏자국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노예 12년>에서 목이 나무에 매인 솔로몬을 카메라가 가만히 응시함으로써 그가 놓인 상황과 그로 인한 무력감을 우리가 멀리서나마 경험하게 한다면, <로건>에서는 훨씬 가까이에서, 잔인하게 살육당한 적들과 그들을 상대하며 이와 같이 상처 입은 울버린의 표정을 마주한다. 이는 하라스 카지노 호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찰스는 로라를 잡으러 온 일당이 들이닥치자 발작을 일으키는데, 인간은 모두 제자리에 굳어버린다. 이를 멈추기 위해 울버린은 방으로 돌아오는데, 이미 적 일당들 모두가 들어와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가 애초에 그들을 죽일 의도는 없던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 문 바로 옆에 서있던 적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려던 울버린이, 이미 침입한 4명의 다른 대원들을 보고서야 몸을 돌려 첫 번째 적을 죽이기 때문이다. 주사를 놓아 발작을 멈춘다 해도 특공대원들이 그들을 포위할 것임은 자명한 상황이었기에 모든 적을 죽이는 것은 그에게 있어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 장면들을 비롯한 사실적인 묘사를 보고 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을지 모르겠다. 판당고닷컴이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성인 관객의 86%가 “좀더 폭력적인 슈퍼 히어로 영화를 보고 싶다”고 답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제임스 맨골드가 이런 요구에 응답하고자 한 것은 아니라고 느껴진다. 영화가 보여주는 얼굴은 오히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엑스맨> 시리즈 내내 저질러야만 했던 수많은 살인들에 대해 울버린 자신이 <로건>에서 결국 지쳐버린 듯한 표정이다.



이러한 삶을 자신이 오롯이 선택한 것도 아니다. <엑스맨 탄생 : 울버린>에서 사형을 당하고서도 죽지 않아 여전히 갇혀있는 그에게 스트라이커는 자신과 같이 일하면 교도소에서 빼내주겠다고 거부할 수 없는 거래를 제안한다. 자유를 되찾기 위해 제안을 받아들인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팀 X에 들어가 스트라이커의 목적에 부합하게 적을 처리하는 일뿐이다. 이미 10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미국 남북전쟁, 제 1, 2차 세계 대전, 베트남전에 참전해 적들을 죽인 울버린은 스트라이커의 팀에서 나온 이후로도 히어로로서 엑스맨/빌런/관객이 모두 원한 살인 기계로서의 본성에 충실히 살아왔다. 그리하여 태어나면서도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능력을 가진 채로 나와 스트라이커의 실험에 의해 살인 병기로 개조된 그는, 완전한 자유 의지로 그러한 삶을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이 죽인 자들의 악몽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가 가브리엘라의 요청을 처음에 거절한 것은 더 이상 이와 같은 어떤 일에도 엮이고 싶지 않다는, 싸움이나 살인은 이제 그만하고 요트에 타서 대양을 유람하며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환골탈태에의 욕망의 발현이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임무를 맡고 싶지 않아 했던 로건이 스스로의 본성과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는 주변 상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또다른 학살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무력감이다. 또한 이것은 자신이 감추려고 무던히 애쓰던 악몽이 별안간 시현되었을 때의 언캐니함이다.



<로건> 속 코믹스의 제목(<언캐니 엑스맨>)에 등장하는 이 단어에 대해서 프로이트와 옌치는 서로 다르게 이야기한다. 프로이트는 언캐니함이 억압된 대상, 감춰진 것의 회귀에서 느껴지는 불편하고 낯선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옌치는 사람은 삶의 어느 순간마다 각각의 방향성이 기반이 되는 상태를 유지하려 하며 살아가는데, 그 방향성을 잃게 되는 것, 그것을 ‘불안한 낯설음’, 즉 언캐니함이라고 했다. 로건에게는 두 가지의 설명 모두 적용할 수 있겠다. X-24는 그의 과거이지만 또한 현재다. 로건의 몸에서 손톱과 아다만티움을 뽑아낼 수 없듯, 살인 병기로서의 그의 본성도 감춰졌을 뿐 제거할 수는 없다. 로건이 요트를 사겠다는 목적으로의 방향성이 기반이 되는 상태를 유지하려 어떠한 일에도 엮이지 않으려 해도, 결국 그의 무의식 속에 감춰둔 본성이 바로 눈앞에 회귀해 그 방향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때문에 로건은 X-24가 로라를 납치하고 자기 눈앞을 뻔히 지나가는데도 멍해져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대신 X-24와의 싸움을 끝내는 것은 로라다. 로건이 그토록 끊어내고 싶어했던 과거와 현재의 본성은, 그의 유전자로 만들어진 로건의 미래 로라의 손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살인하지 않아도 된다”, “놈들의 뜻대로 살지 말라”고, 로라만큼은 살인 기계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긴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마침내 죽지 못하는 굴레를 벗어나 장엄하게 퇴장한다. 뮤턴트들은 캐나다로 도망치고, 영화는 끝난다. 후속편에 대한 어떠한 쿠키 영상도 남기지 않았다. 나 또한 2대 울버린이 더 이상 영화에 등장하지 않길 바란다. 그것이 로건의 바람대로 로라가 평화롭게 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로건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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