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축생활 VOL.11 지금은 공원 시대
‘월드 와이드 파크’에서는 문화비축기지와 닮은 세계의 이색 공원을 만나본다. 첫 주인공은 낡은 공항을 재생해 탄생시킨 베를린의 템펠호퍼 공원이다. 재생의 내력은 무엇인지, 광활한 부지를 베를린 시민들은 어떻게 채워가는지, 유럽에서 심서정 작가가 전한다.
글·사진 심서정
베를린에서 지낸 1년 동안, 맑게 갠 해 질 녘이면 공식처럼 템펠호퍼 공원을 찾았다. 베를린에서 가장 큰 공원인 이곳은 알수록 매력적이다. 380만m2에 달하는 면적은 센트럴파크(340만m2)를 능가한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를 갖춘 데는 이유가 있다. 템펠호퍼 공원은 본래 공항이었다. 분단과 함께 베를린이 동서로 나뉘었을 때, 동독 속 섬이던 서베를린이 바깥의 자유세계와 통하는 유일한 창구가 템펠호프 공항(Flughafen Tempelhof)이었다. 1920년대, 개항 당시부터 유럽 최대 규모이던 공항은 나치하에서는 선전 공간으로도 이용됐다. 공항 한편에 정치범 수용소인 ‘컬럼비아하우스(Columbia-haus)’를 지어 수감자를 고문했고, 전쟁이 본격화되자 강제 노역을 위해 데려 온 노동자를 이곳에 살게 했다.
곡절이 많던 공항이 폐쇄된 것은 2008년이다. 활주로가 짧아 대형 비행기의 이착륙이 어려웠고, 도심에 위치해 확장성이 부족한 데다 소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으로 오던 항공 노선은 베를린 쇠네펠트(Schönefeld) 공항과 테겔(Tegel) 공항으로 흩어졌다. 이후 공항터를 열어달라는 시민들의 요청에 따라, 2010년 5월 8일 지금처럼 거대한 공원이 탄생했다. 그런데 공원이 된 후 얼마 안 가 위기가 있었다. 베를린시가 극심한 주택난에 단비를 내려줄 곳으로 공원 부지를 지목한 것이다. 시는 수천 호의 아파트와 중앙 도서관 건설을 계획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주민 투표 결과 과반이 넘는 반대표로 계획은 무산되었다. 베를린 시민들은 개발과 잘 정비된 미래의 택지가 아닌, 모두를 위한 오늘의 공원을 택했다.
사실 규모를 듣고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적잖이 실망했다. 공항이었던 만큼, 공원 대부분이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한 바퀴 도는 데 얼마나 걸릴지 궁금해져 다시 방문했고, 차차 빈 공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드넓은 활주로에서 각자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릴 적 보던 <월리를 찾아라>의 한 페이지가 현실로 나타난 듯하다. 그 틈에서 기분 좋은 날엔 경쾌하게, 울적한 날엔 묵직하게 발을 내디뎠다. 그러고 나면 언제나 한결 상쾌해졌다. 걷다 보면 컨테이너가 모인 구역이 눈에 띈다. 2015년, 독일에 시리아 난민 유입이 급격히 증가했을 때 지은 수용 시설이다. 원래는 올 상반기에 해체할 예정이었으나, 더 늘어날지 모를 난민을 위해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활주로 사이 초원 구역에는 독일의 멸종 위기종 새, 스카이락(Skylark)이 산다. 스카이락을 보호하기 위해 3월부터 7월 말까지 이 구역은 입장이 금지된다.
템펠호퍼 공원은 쓰임새를 카멜레온처럼 바꾸며 베를린 시민들의 곁에 머물고 있다. 여객 터미널 건물은 현재 대형 국제 행사와 페스티벌, 박람회를 위한 장으로 쓰인다. 다양한 기관과 회사가 입주해 이곳에 어울리는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다. 너른 야외 공간은 스케이트보드를 비롯한 스포츠를 즐기는 이들로 붐빈다. 반려견이 목줄 없이 뛰놀 수 있는 구역도 인기가 좋다. 바비큐 시설이 있는 그릴플라 츠(Grillplatz)는 가족 나들이 장소로 그만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템펠호퍼 공원에서 무얼 하면 좋을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곳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곳이라고.
심서정 I 여행작가. 대학에서 교양 과목으로 들은 기초 독일어 때문에 베를린에 살게 됐다. 현재는 다른 도시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베를린을 그리워한다. @seojeong_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