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인사이트]스타트업이 레거시 골리앗을 인수하는 시대

기술이 아닌 ‘일상·데이터·신뢰’를 사들이는 새로운 M&A 공식과 그 위

by 신승호



6540_12311_3458.png 이미지=제미나이 생성


최근 한국 테크 생태계에서는 묘한 권력의 역전이 관측되고 있다.


한때는 거대 포털과 대기업 플랫폼이 유망한 스타트업을 흡수하며 덩치를 키워왔다면, 이제는 반대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날렵한 스타트업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레거시 서비스’를 역으로 인수하거나 운영권을 확보하며, 플랫폼의 중심부로 진입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외형 확장이 아니다. AI 기술이라는 강력한 엔진을 손에 넣었지만, 정작 그 엔진을 돌릴 데이터와 사용자 접점이라는 연료가 절실한 스타트업들의 생존 전략에 가깝다. 기술은 빠르게 상향 평준화되었고, 경쟁의 핵심은 이제 ‘어디서, 어떤 맥락의 데이터를 학습할 것인가’로 이동했다.


최근 팬덤 비즈니스 솔루션 기업 비스테이지(비마이프렌즈)가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FLO의 운영권을 확보한 사건은 이 흐름의 상징처럼 보인다.


음악은 인간의 일상에서 가장 긴 시간을 점유하는 콘텐츠다. 비스테이지가 손에 넣은 것은 단순한 음원 유통 권리가 아니다. 수백만 명의 청취 데이터, 아티스트와 팬 사이의 감정적 연결, 그리고 매일같이 앱을 여는 사용자 루틴이다. AI 시대의 권력은 기술이 아니라 ‘습관’을 점유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6540_12310_2838.png 이미지=비마이프렌즈


업스테이지가 카카오에서 분산된 다음(Daum) 포털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은 이 전략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성장이 정체된 포털은 누군가에게는 낡은 유산일 수 있다. 그러나 AI 기업에게 다음은 황금에 가까운 자산이다. 수십 년간 축적된 뉴스 아카이브, 검색 히스토리, 그리고 여전히 유효한 사회적 신뢰도는 AI 모델을 실생활에 즉각 적용하고 고도화할 수 있는 거대한 실험장이 된다. 이는 단순한 기술 고도화가 아니라, ‘맥락의 깊이’를 단번에 확보하는 선택이다.


오아시스마켓의 티몬 브랜드 및 자산 인수도 주목할 만하다.


탄탄한 신선식품 물류망을 가진 오아시스는 티몬이 쌓아온 광범위한 사용자 인지도와 오픈마켓 운영 경험을 흡수함으로써, 신생 기업의 구조적 약점인 ‘브랜드 도달 범위’를 단숨에 보완했다. 티몬이 가진 1세대 이커머스의 운영 자산은 오아시스의 기술적 정교함과 결합해, 단순한 새벽 배송을 넘어선 데이터 커머스 플랫폼으로의 재가동 가능성을 열고 있다.


하지만 이 전략이 언제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레거시를 품는 순간, 스타트업은 동시에 복합적인 리스크를 떠안게 된다. 첫 번째 리스크는 조직 문화와 의사결정 속도의 충돌이다. 스타트업의 경쟁력은 빠른 실험과 과감한 전환에 있지만, 레거시 조직은 수년간 축적된 프로세스와 합의 구조를 내재하고 있다. 운영권을 확보했다고 해서 곧바로 스타트업식 실행력이 이식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부 마찰로 인해 의사결정이 느려지고, 기존 스타트업 팀의 에너지가 소진되는 역설이 발생하기도 한다.


두 번째는 데이터의 역설이다. 오래된 서비스일수록 데이터는 풍부하지만, 구조는 파편화돼 있고 개인정보 보호 규제와 이용자 동의 문제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AI 학습에 즉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데이터가 법적·기술적 이유로 ‘봉인된 자산’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레거시는 황금광산이 될 수도 있지만, 정비 비용이 끝없이 투입되는 부채가 될 수도 있다.


세 번째는 브랜드 관성의 함정이다. 레거시 서비스는 높은 인지도를 갖는 대신, 특정 세대와 이미지에 강하게 묶여 있다. 새로운 AI 경험을 입히려 할수록 기존 이용자들의 반발이 커지고, 반대로 신규 세대에게는 ‘이미 끝난 서비스’로 인식될 위험도 존재한다. 브랜드를 유지하는 것과 브랜드를 재설계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게임이다.


결국 AI 시대의 레거시 인수에서 관건은 ‘인수 자체’가 아니다.


핵심은 재설계 능력이다. 무엇을 유지하고, 무엇을 버리며, 어디까지 새로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시나리오 없이 진행되는 M&A는 스타트업에게 과도한 체력 소모를 안긴다.


AI 시대의 다윗들은 이제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더 정교한 균형 감각을 요구받는다. 레거시는 지름길이 될 수도,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 이 차이를 가르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관계와 신뢰를 어디까지 다시 설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다. 우리는 지금, 그 위험한 재가동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https://www.kmjournal.net/news/articleView.html?idxno=6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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