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⑦ 이정후

이정후의 내러티브, 나는 내 그림자를 넓혔을 뿐이다

by 신승호

나는 야구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삼성 라이온즈 어린이 팬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 해태 타이거즈의 이종범이 정말 싫었다. 1번 타자이면서 3번 타자처럼 치고, 수비는 인간의 범위를 넘어섰고, 도루는 거의 순간이동.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그를 보며, 나는 내내 속으로 외쳤다. “이번엔 제발 좀 막혀라.” 하지만 그는 막히지 않았다. 경기가 이종범이라는 사람의 쇼처럼 보이는 날이 많았고, 그럴수록 나는 더 싫어졌다. 지금 돌아보면, 사실 싫었던 게 아니다. 무서웠던 거다. 너무 잘해서, 너무 완벽해서, 그리고 내 편이 아니어서.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의 아들이 등장했다. 이정후. 타이틀은 “바람의 손자.” 사람들은 ‘역시 유전자’라며 기대했고, 나는 다시 확신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못 넘지.” 야구는 유전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이정후는 성실했고, 조용했고, 늘 정확했다. 그러나 처음엔 감동이 없었다. 좋은 선수지만, 전설급은 아니라고 봤다. 아버지가 ‘야구를 예술처럼’ 했다면, 아들은 ‘야구를 분석처럼’ 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는 매년 성장하며 끝내 KBO를 지배하고 MLB에 진출을 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나는 아직은 이종범 수준은 아니라고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편견을 쌓고 있었다.


그런데 2025년 4월14일.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날리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내 오래된 확신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넘었네. 진짜, 넘었네. 이제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 전설을 쓰기 시작한 사람이 됐다.


이정후의 성공은 단순한 야구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2세대 동일직업군 완성 서사다. 해방 이후 처음으로 ‘직업을 가진 부모’가 생기고, 그 자녀가 그 직업을 직접 체험하며 성장한 세대. 이정후는 아버지로부터 재능을 물려받았지만, 그 재능을 자기 언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872_984_1136.jpg 사진=유튜브 채널 '썸타임즈' 캡처

야구장의 공기, 불펜의 루틴, 라커룸의 침묵과 박수의 온도. 이정후는 그 모든 걸 보고, 듣고, 숨 쉬며 자란 선수다. 그는 야구를 배운 것이 아니라, 야구 안에서 자라난 것이다. 그리고 그 감각의 반은, 어머니로부터 왔을지도 모른다. 정연희. 이정후의 어머니. 운동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가정이라는 내야를 지켜낸 진짜 중심수비수. 말없이 끓인 국, 피곤한 눈빛을 읽는 말투, 들뜨지 않게 눌러주는 온도. 야구가 기술이라면, 사람으로 사는 법은 정서에서 배운다. 이정후는 몸의 리듬은 아버지에게서, 마음의 리듬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지금 이 성장스토리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왜 지금 이렇게 많은 2세대 성공담이 등장하고 있을까? 그건 유전 때문만이 아니다. 1세대의 성공이 만든 환경, 정보, 감각, 관계, 리듬. 그 모든 것이 2세대에게는 ‘보이지 않는 조력자’처럼 작용한다. 농구의 허재-허웅-허훈, 소설가 한승원-한강, 그리고 이종범-이정후. 유전은 시작이지만, 서사는 자기 손으로 써야 한다.


이정후는 아버지를 지운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지막 문장을 자신의 첫 문장으로 완성한 선수다. 사실 아버지의 그늘과 이름을 넘어서는 이야기는 인류가 가장 오래 반복해온 소재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운명을 거스르는 아들’, <스타워즈>의 루크 스카이워커, <더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까지. 아버지의 이름을 넘어서기 위한 투쟁은 늘 가장 위대한 이야기의 핵이었다. 하지만 이정후의 이야기는 복수도 반항도 아니다. 존중하면서도 넘어선다. 가장 아름다운 현대적 변주다.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지만, 어제 그 연타석 홈런은 숫자가 아니라 감정과 믿음을 바꾸는 한 방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밟지 않았다. 나는 내 그림자를 넓혔을 뿐이다.” 이정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한 아들의 아버지로서, 그 멋진 아들의 도전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언젠가 영화가 되어도 좋겠다. 야구장에서가 아니라, 극장에서 다시 벅찬 감정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


KMJ 발행인 신승호 www.km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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