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에 여름 향기가 담겨왔다

밤 9시 글쓰기. 24.10.10. 감사일기

by 쿰파니스

잿빛 구름이 바삐 서쪽으로 흐르는 가을날,

더운 여름이 담긴 택배가 왔다.


올 6월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이화동 낙산공원 언덕 꼭대기에서 종묘까지 걸어서 출퇴근했다.

264 계단을 내려오면 이화장이었다.

방송통신대학교 옆 내리막길을 따라 큰길로 나서면 대학로였다.

광장시장시장 쪽으로 나가 종로5가 약국거리를 지나 종묘로 갔다.


퇴근할 때는 종로통을 걸었다.

정문을 나와 좌측으로 종로 5가를 쭉 걸어 동대문까지 갔다.

30여 분 줄을 서서 광장시장에서 꽈배기 사거나,

동대문 시장 좌판에서 떡볶이를 먹을 때도 있었다.

흥인지문 광장에서 한양도성을 걸어 올라 집에 갔다.


매일 등산 가까운 출퇴근 길이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잔뜩 흥분한 이후처럼 속옷까지 흠뻑 젖었다.

그걸 감내해 낸 건 순전히 풍광 때문이었다.


삼 개월 구애 끝에 바위 언덕 위 옛 집 방 한 칸이 나를 받아들였다.

간간히 개미가 찾아오고, 방문을 열면 거미가 눈을 맞춰오기도 했지만, 즐거웠다.

담장 아래 대학로가 있었고,

창문엔 정선의 '인왕재색도'가 컬러로 걸린 듯했다.

식후 소화 겸해서 슬리퍼 끌고 어슬렁거리며 대문을 나서면 낙산공원이었다.

서울 풍경이 한 눈에 펼쳐졌다.

그 즐거움에 푹 빠져 매일 언덕을 오르내리는 수고로움을 감내했다.


낙엽에 방랑했고, 찬바람에 훌쩍거렸고, 벚꽃 비 맞으며 흥얼거렸다.

더운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광주로 내려왔다.


낙산공원 즐거운 추억에는 보보담도 한몫했다.


보보담(步步談)은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라는 의미로

우리나라 인문풍경을 소개하는 잡지다.

LS네트웍스에서 발행하는 무가지로 연 4회 발행한다.

부산 사는 블로그 이웃 소개로 알았다.

그분은 청도 사는 이웃에게 안내 받았다 했다.


넉넉한 주말 오후면 커피 한 잔 들고 보보담 겨드랑이에 끼고 서재 가듯 대문을 나섰다.

성북동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보보담을 펼쳤다.

급하게 읽을 필요도 없었고,

읽다가 한 눈 팔아도 편했다.

전주와 제주와 서울 정동 이야기에 정신 팔려 해넘어 가는 줄 모를 때도 있었다.

여름호를 받지 못하고 이사를 했다.


주소변경 신청을 했는데 착오가 있었나 보다.

이사 후 한달쯤 지나 서울 주소로 배달이 완료되었다는 택배 문자가 왔다.

한동안 서울에 가야하나 고민했으나 잊기로 했다.


며칠전 집 주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보내준다고 주소를 달라는.

착불로 보내주시면 고맙겠다는 답을 드렸다.


우체국 택배로 왔다.

요금 4천원이 선불로 되어 있었다.

포장을 뜯으니 서울 냄새가 피어오른다.

힘들게 계단을 오르내렸을 발자욱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보보담 여름 여행지는 여수였다.

표지를 넘기니 구자열 주간이 '여수 바다와 섬의 따뜻한 힘'을 담았다고 전했다.

찬바람 불기 시작하는 가을 초입에 여름의 따스한 이야기를 듣는 셈이다.

어쩌면 종로 낙산공원에서 보내는 주인 아저씨의 따스한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이사를 나오며 세입자를 구하면서 폐를 끼쳤었다.

주인은 넉넉한 웃음을 머금고 다녔다.

늦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오래된 우편물을 챙겨 보내준 그 마음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