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나홀로 집에

밤 9시 글쓰기. 24.10.09. 감사일기

by 쿰파니스

한글날 아침.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더 느지막하게 아침을 먹었다.

창을 활짝 열었다.

사선으로 넘어오는 쨍한 햇살에

한여름 가로등 불빛 아래 나방처럼 먼지가 날았다.

대통령은 동남아 순방 떠나셨고,

마님도 멀리에 계시고,

뭐하지,

마님이 감동할 만큼 청소나 할까.

음악이 집안에 꽉 차야 청소하는 분위기가 산다지만,

솔직해지자.

말짱 거짓말이다.

옛사람들이 즐거워서 노동요를 불렀나.

힘듬을 잊기 위해서였지.

화창한 가을날 집에 박혀 청소하는 나를 변명하는 소심한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유튜브에 가을 노래를 부탁했다.

‘가을편지’를 들려준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낙엽이 흩어진 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고은이 쓴 노랫말에 김민기가 곡을 붙인 노래다.

최양숙이 먼저 불렀다.

광고가 지났다.

알고리즘이 야무진 디제이(DJ)처럼 쉬지 않고 이어준다.

최백호가 김민기가 이어 부른다.

어라, 양희은도 부르네.

청소가 끝날 즈음이면 누가 부르고 있을까.


하기 싫다.

그냥 하지 말까.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 하나 고민하며,

어디 모르는 여자 없나 생각하며,

이불 털어 빨랫줄에 널었다.

책상을 정리했다.

문틈에 낀 먼지를 걷어냈다.

침대 밑에 숨어 있는 속옷까지 찾아내 세탁기에 넣었다.

(이런 건 왜 그런 곳에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커피 한 잔 유혹이 간절하다.

끝낸 자의 여유를 만끽하자 다독이며,

걸레를 들었다.

바람 차다고 문을 꼭꼭 닫는데 어디로 들어왔지.

먼지 다 긁어 모으면 솜방석도 만들겠다.

매일이다시피 쓸고 닦는데도 이렇다.

누가보면 명절맞이 연례행사로 오해하겠다.

박테리아처럼 자가 번식하는 능력이라도 지녔나.

불가사의다.


때 빼고 광내고 나니 세탁기도 제 할 일을 끝냈다.

탈탈 털고 쭉쭉 당겨 옷걸이에 걸었다.

빨랫줄에 무지개가 걸렸다.

벌써 점심 때다.

낭만은 개뿔.

우아한 커피 한 잔의 여유는 드라마에서만 가능한 거였다.

‘청소 끝’ 하며 두 팔을 벌리며 환하게 웃는 자세도 그러하고.

하나 남은 라면을 끓였다.

계란 꺼내는 것도, 파 써는 것도 귀찮다.

청소란 게 요물이어서,

해도 표시가 나지 않는데, 안 하면 꼭 표시가 난다.

표시 나지 않게 집을 가꾸었을 마님은

멀리서도 집 걱정하는 건 아닌지.

고마운 이여,

걱정 붙들어 매고 재미나게 노소서.

50대 남자가

휴일, 나 홀로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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