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유일 '4대 종교 성지'가 공존하는 신념의 땅, 전남 영광
지난 17일, 남도의 대지는 미세먼지에 덮여 뿌연 숨을 내뱉고 있었다. 전남 영광(靈光)으로 향하는 길, 하늘까지 어두워 시야는 명확하지 않았다. 아침 7시. 백수해안도로 노을전망대에 섰다.
그리웠던 겨울 아침 바다였기도 하거니와 머릿속을 맑게 비워낸 뒤라야 오늘 여행을 온전히 담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첫 여정으로 찾았는데, 바다는 저 멀리 있었다. 간조(干潮)였다. 반겨준 것은 살을 에듯 차가운 바닷바람이었다. 거친 바람에 미세먼지도 버티기 힘들었는지 투명해진 공기가 상쾌했다.
뻘을 드러낸 채 침묵하는 바다를 보며, 오늘 여행을 가늠해 보았다. 영광(靈光), 신령스러운 기운(靈)이 빛(光)으로 승화된 땅. 그래서일까. 개신교, 불교, 천주교, 원불교가 한 울타리 안에 공존하는 한국 유일의 4대 종교 성지가 되었다.
첫 여정은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였다. 노을전망대에서 북쪽으로 10여 분, 영광대교를 건넜다. 우측으로 법성포(法聖浦)로 들어가는 긴 수로가 활처럼 휘어 벌판을 휘감는다. 성인이 불법을 들여온 포구라는 뜻의 지명이 이 땅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384년,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 존자가 중국 동진을 거쳐 이곳에 발을 내디뎠다.
법성포구 북쪽 야트막한 언덕 위 사면대불(四面大佛)이 아파트 10층 높이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한다. 이곳은 한국의 일반적인 사찰과는 건축 양식부터 궤를 달리한다. 간다라 양식을 재현한 건축물과 섬세한 석조 조각들은 낯선 세계관이 도착했던 현장임을 웅변한다.
유물전시관 속 불상들의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보며 드는 생각이, 당시 백제인들에게 마라난타는 생경한 얼굴과 언어를 가진 이방인이었을 터다. 미지의 세상에 생애를 온전히 바친 그의 강인한 신념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이를 기꺼이 맞아들인 사람들의 관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포구 너머 백수읍 길룡리 원불교(圓佛敎) 영산 성지, 법성포로 흐르는 물길에 있었다. 소태산 박중빈(1891~1943) 대종사가 태어난 곳이자 수행을 쌓고 대각을 이룬 곳이다. 화려한 단청이나 장식이 배제된 성지는 정갈했다.
대종사가 제자들과 함께 지은 최초의 교당인 영산원(靈山院)에서 순례를 시작했다. 본래 명칭은 구간도실. 1918년 지어진 이 소박한 초가집이 원불교 교화의 시작점이다. 1923년 옥녀봉 아래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바로 앞에는 영산대각전, 1936년 건립 당시에 영광군에서 가장 큰 집회 장소였다. 몇 차례 개보수 공사를 하였다 하나 옛 분위기는 그대로 남아 있다.
대개 종교가 창시되면 새로운 진리를 알리기 위해서 전도가 우선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대종사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방언공사(防堰工事, 간척사업)였다. 개교 3년째인 1918년에 아홉 명의 제자와 함께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들을 구제하기 위해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다. 3차에 걸친 간척사업 끝에 버려진 갯벌을 3만 평의 옥토로 바꾸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정관평을 나와 영산선학대학교 앞을 지나 생가로 향했다. 느티나무 가로수 길은 고즈넉했다. 명상길이라 불러도 손색없어 보였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이라면 참으로 멋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1916년 깨달음을 얻은 노루목 대각터는 생가에서 건너다보였다. 만고일월(萬古日月)이라고 쓰인 비석과 일원상이 맞아 주었다.
대종사의 기도터인 삼밭재 마당바위, 입정에 든 선진포 입정터, 9인 제자가 기도를 올렸던 9인 기도봉까지 모두 돌아보려면 하루 족히 발품을 팔아도 부족해 보였다. 아쉬움을 간직하고 발길을 돌렸다. 뭔가 남겨 두어야 다시 찾을 핑곗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법성포에 왔으니 보리굴비 정식은 당연했다. 굴비 거리를 기웃거렸으나, 혼자 온 손님은 받지 않는다는 바닷바람보다 더 차가운 대답만 돌아왔다. 1인 식사 불가라는 상업적 논리 앞에 여행자의 계획은 먼지처럼 날렸다. 마라난타를 받아들였던 관용도 상업주의 앞에서는 힘을 잃은 듯했다. 혼자 온 게 죄지.
왔던 길을 되돌아 백수초등학교 운동장을 보며 백합죽을 먹었다. 매서운 바닷바람에 얼어붙었던 몸 안으로 뜨겁고 진한 백합죽이 들어오는 순간, 굴비에 대한 미련은 씻은 듯 사라졌다. 쫄깃하고 달콤한 식감과 은은하게 퍼지는 바다 향기. 추운 겨울날 이보다 더 완벽한 위로의 음식은 없을성싶었다.
점심 식사가 바뀌면서 경로도 역전되었다. 영광읍에 있는 성당에서 시작하여 염산면 소재 염산교회와 야월교회를 둘러보는 것이었으나, 가까운 야월교회를 먼저 찾기로 했다.
염산면의 갯벌은 광활했다. 염전이 자리 잡았던 곳에 풍력발전기가 들어섰다. 야월교회 가는 길, 빽빽하게 들어선 거대한 하얀 날개가 한없이 다가오고 멀어졌다. 교회는 마을 가운데 있었다. 간척사업 전에는 물이 들어오면 길이 잠기는 섬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 공산당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회는 불탔고, 교인 65명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산채로 매장되거나 수장당했다.
기념비는 마당에, 순교기념관은 예배당 뒤쪽이었다. 기념관을 지키며 안내하는, 몇 년 전 귀촌했다는 장로님의 표정에는 교회에 대한 깊은 자부심이 가득했다. 폐허가 되었던 이곳에 다시 신도가 모였고 많은 순례객이 찾는다는 그의 말에서, 죽음으로 지킨 신념이 어떻게 부활하는지 보이는 듯했다.
염산교회는 그곳에서 멀지 않았다. 논과 뻘과 바다가 넓게 펼쳐진 평지에 유일하게 솟은 조그만 언덕 위에 자리잡았다. 주변 지형 덕분인지 성채처럼 웅장해 보였다. 이곳에서 단일 교회로는 한국 최다인 77인의 순교자가 나왔다.
주차장 옆 순교기념공원. 자연석을 얹은 표지석과 합장묘가 있다. 77인의 순교자 중 32명을 안장했다고 한다. 기념관은 교회 2층이었다. 설도항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교인들 목에 돌을 매달아 산 채로 바다에 던졌다는 수문은 바로 앞이다. 기념관에 전시된, 새끼줄 묶인 돌덩이를 보니 숨이 턱 막힌다. 인민군에게 붙잡힌 신도들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돌을 매단 채 찬송을 부르며 수면 아래로 잠겼다고 한다. 비현실적인 광경이 떠오르며 소름이 돋는다.
종교를 떠나 이 순교의 현장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신념이란 때로 생명보다 무거울 수 있음을 그 참혹한 돌덩이들이 웅변하고 있었다. 종교적 교리를 넘어, 인간으로서 포기할 수 없는 자유의지를 보는 듯했다. 한편으론 의문도 들었다. 기념관은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기억하기 위해 서 있는 것인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확신할 수 없어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차로 30여 분, 영광읍 도동리에 위치한 영광순교자기념성당에 도착했다. 붉은 벽돌과 석조가 조화를 이루며 도심의 번잡함 속에 고요한 섬처럼 떠 있었다. 앞선 교회들의 비극이 전쟁이라는 광기 속에서 벌어진 폭발적인 사건이었다면, 이곳은 오랜 시간 이어졌던 서슬 퍼런 탄압을 묵묵히 견뎌낸 인고의 기록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성당 입구의 순교자 기념문이다. 네 개의 칼 모양 기둥은 순교자 이화백, 복산리 오씨, 김치명, 유문보를 의미한다고 한다. 순교자 비석과 이해인 수녀의 시비를 지나 기념관에 들었다. 자못 엄숙하고 경건했다. 12인의 순교자를 기리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발길을 잡았다. ‘핏빛 사랑으로 진복(眞福)을 사신 영광의 순교자들’이라는 다소 긴 제목이었다. 형틀에 묶이고 칼날 아래 서면서도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이들의 모습이 오색 빛에 투영되어 있었다.
신념이란 때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 속에 갈무리할 때 더 단단해진다는 듯이 영광성당의 견고한 돌벽은, 비록 목숨을 잃을지언정 내면의 빛을 끝내 꺼뜨리지 않았던 이들의 꼿꼿한 자존심인 듯했다.
다시 백수해안도로 노을 전망대. 바다는 발밑까지 와 있었다. 만조(滿潮)였다. 하늘은 장엄한 저녁노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4대 종교 성지를 거치며 목격한 것은 각기 다른 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신념이었고, 그것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사람들의 흔적이었다. 바다 위로 번지는 노을이, 삽을 든 성자의 땀방울처럼 반짝였다.
- <화순매일신문>과 <오마이뉴스>에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