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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적운 Dec 19. 2022

로망

그러니까 김이현은 그런 사람이었다. 식사는 하지 않아도 담배는 피워야 하는 사람. 새벽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나와 담배를 피우면 강연우는 그 옆에서 끝까지 기다렸다. 핸드폰을 하지도 않고 말을 걸지도 않았다. 가끔은 동이 튼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고, 또 가끔은 김이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강연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독어과 학생들 사이에서 김이현은 유명했다. 존나 불우하고 불운한 새끼라고. 그 두 개의 형용사만으로도 김이현을 설명하기가 충분하다고 했다. 연민도 아니고 동정도 아니었다. 확실한 불만의 표현이었다. 누가 먼저 뱉었는지 모를 그 문장은 김이현을 쫓아다녔다. 중학생 때 장난이랍시고 친구들이 등 뒤에 붙여 놓은 [바보] 포스트잇처럼, 김이현의 등 뒤에는 그런 문구가 딱 붙어 있었다. 등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이 무겁지도 않은지 김이현은 허리를 빳빳이 치켜세우고 다녔다.


시작은 이랬다. 독어과 학생들 중 학과장 추천을 받아 독일에 있는 대학에서 일 년간 공부를 할 수 있게 하는 제도. 독일 대학 교류 프로그램이라는 조잡한 이름을 가진 제도였다. 학교에 흔히 있는 교환학생 제도와는 조금 달랐는데, 학비 지원이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생들은 죄다 학과장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이 학년 이 학기가 끝나갈 무렵 대상자가 정해진다. 그래서 이 학년 대상 전공 수업에서는 유독 학생들이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으려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전 강의가 끝나기도 전에 강의실 앞문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이 있지를 않나,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제발 맨 앞자리에 자리 하나만 마련해 달라고 부탁하는 학생들이 있지를 않나. 심지어는 기프티콘 거래까지 만연한 상황이었다.

김이현은 이전 강의가 끝나기도 전에 강의실에 도착해, 앞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 긴 줄의 시작은 대부분 김이현이었다. 김이현은 강의가 시작되기 이십 분 전, 이르면 삼십 분 전부터 강의실에 도착해 있었다. 전 수업이 없으면 김이현이 먼저 강의실에 들어와 불을 켜기도 했다. 쟤 어지간히 독일 가고 싶나 보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 말은 분명한 사실이 되고 거스를 수 없는 진리가 된다. 김이현이 독일 안 가면 누가 가겠냐? 김이현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김이현 뒤에서 하는 사람은 수두룩했다. 독어과를 배경으로 하는 연극 대사가 된 양, 그 문장에는 필요한 지문이 있었다. (비꼬듯이 웃으면서)

그러나 김이현은 일 학년 때부터 그래 왔다. 아무도 그 시간에 도착하지 않아서 몰랐을 뿐이었다. 가끔 강의실에 일찍 도착해 수업을 준비하는 교수가 이미 강의실 한쪽에 앉아 있는 김이현을 보고 놀랄 정도였다. 김이현은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핸드폰을 하지도, 자리에 엎드려 잠을 청하지도 않았다. 졸린 눈을 깜박이다 가끔 수업 자료를 뒤적이며 자기 나름대로 예습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담담하고 무던한 김이현. 그런데도 김이현의 존재감은 과했다. 김이현이 없는 자리에서도 –물론 대부분의 자리에 김이현이 없긴 했다- 김이현의 이름은 사람들의 대화 주제에 빠지지를 않았다. 대화의 팔십 퍼센트는 걔 존나 짜증나고 재수 없어, 였다.     


독일 대학 교류 프로그램에 뽑힌 건 당연하게도 김이현이었다. 고등학생들처럼 전교생이 다 모인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상장 수여식을 진행한 것도 아니었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안 건지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내가 그랬잖아 김이현 아니면 누가 가겠냐고. 다들 그렇게 한 마디씩 거들었다. 물론 여기에도 지문이 붙어 있었다. (비아냥거리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소문은 항상 몸집이 커지고, 커진 만큼 이상한 것들이 따라 붙는다. 철가루가 잔뜩 붙어 더러워진 자석마냥. 김이현을 향한 소문도 그랬다. 야 미친 김이현 그거 거절했대. 와 씨발 왜? 자기는 독어에 관심 없다고 그랬다던데? 쟤 전과할 거라서 학점 챙긴 거래. 존나 빡친다…… 그러다 불쑥 진실이 하나 붙는다. 걔 생활비 없어서 그런 거라던데? 독일 가서 지낼 생활비 없다고.

그때부터 김이현은 존나 불우하고 불운한 새끼가 됐다. 굴러온 복을 지 발로 걷어찬 새끼라고. 독일 대학 교류 프로그램은 학번 대표가 가기로 결정되었다. 학생들은 그 애를 둘러싸고 축하한다며 강의실이 다 울리도록 박수까지 쳐댔다. 김이현은 커다란 메신저백을 어깨에 메고 그 무리 옆을 슥 지나갔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학생들은 김이현이 강의실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하여튼 재수 없지 않냐며 말을 이었다. 김이현의 등 뒤에 붙어 있는 [존나 불우하고 불운하고 재수 없는 어쩌고] 포스트잇은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독어과를 배경으로 한 연극에서 강연우는 독어과 학생 5 정도의 배역을 맡을 만한 학생이었다. 수업에는 적당히 참여했고, 학생들과 적당히 어울렸으며, 놀기도 적당히 놀았다. 이 학년이 된 초반에는 다른 학생들처럼 열심히 공부해 독일이라도 가 볼까 했다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포기했다. 역시 독어는 적성에 안 맞아. 그렇지만 전과를 할 생각도 딱히 없었다. 복수전공이면 모를까. 취업은 경영이지! 강연우는 경영학과를 복수전공 하기 위해 몇 개의 강의를 듣는 쪽을 택했다. 독일 대학 교류 프로그램이 아닌.

강연우는 학교 내 가장 유명한 밴드 동아리 보컬이었다. 니는 그냥 발라더야. 보컬 오디션 때 말했던 동아리 선배는 그래놓고 강연우를 합격시켰다. 발라드고 락이고, 강연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강연우는 음악이 좋았다. 독어보다는 음악. 학과보다는 동아리. 맨날 같이 다니는 친구들도 죄다 동아리 친구들이었다. 공대 한 명, 미대 한 명, 그리고 음대 세 명. 악기 하나씩을 등에 업고 여기저기 쏘다녔다. 강연우는 악기 대신 악보를 들고 다녔다.

강연우는 김이현을 알았다. 애초에 독어과 학생 중에 김이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강의실에 앉아 있기만 해도 김이현에 대해 수군거리는 얘기들이 들려왔다. 김이현이 누군지 모르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강연우는 대부분의 강의에서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 시선 안에서는 김이현의 뒤통수밖에 보이지가 않았다. 되게…… 동그랗네. 그게 강연우가 생각한 김이현의 이미지였다. 김이현 등 뒤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 같은 건 잘 보이지 않았다.     


합주를 끝낸 어느 밤 본인의 자취방 앞 편의점에서 김이현을 마주한 강연우는 단번에 김이현을 알아봤다. 신기한 일이었다. 김이현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기시감에 물건에 둔 시선을 거두고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을 올려다보려 했는데, 그 가슴팍에 달려 있는 명찰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김 이 현

그게 이 학년 이 학기 종강 직전이었다. 김이현이 존나 불우하고 불운한 새끼라는 소리를 막 듣기 시작했던 때. 강연우도 그 말을 얼핏 들었다. 종종 대화를 나눈 적 있는 같은 과 학생 중 한 명이 강연우에게 말한 적 있다. 너 그거 알지 독일 그 프로그램 김이현한테 교수님이 제안했는데 걔가 거절한 거, 걔 독일 가서 지낼 생활비 없어서 그랬다더라. 학비 지원까지 해 주는데 안 갈 정도면…… 강연우가 반응하지 않자 그 정도에서 멈췄다. 굴러온 복을 자기 발로 걷어차는 것도 재능이다 재능. 그 애는 중얼거리고선 다른 학생에게로 발을 돌렸다.

강연우는 혼자 생각했다. 그게 왜 자기 발로 걷어찬 거지? 애초에 굴러온 복이 아니라 얻어낸 복이나 쟁취한 복에 더 가깝지 않나? 그리고 학비 지원이랑 생활비 지원은 다른 건데. 등록금에 기숙사 정도 지원해 주던데. 해외에서 사는 게 쉽나. 하여튼 이상한 사람 많다, 참. 저 앞에 김이현이 앉아 있었다. 동그란 머리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머리통은 새벽에도 동그랬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머리카락을 볼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요동쳤다. 그래서 좀 웃겼다. 포스기 옆에 프린트된 강의 자료가 놓여 있었다. 알아볼 수 없는 필기가 잔뜩이었다. 강연우는 그 종이를 가리켰고, 김이현의 시선이 강연우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나도 이 강의 듣는데.”

“……”

“너 김이현이지. 안녕. 나 강연우. 같은 과……”

“알아.”

“안다고?”

강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대답했는데, 김이현은 놀라지도 않고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나를 왜 알지…… 오히려 민망해진 강연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너 밴드 하잖아.”

음악 따위에는 관심도 없을 줄 알았던 김이현의 시선이 강연우의 왼손에 들린 악보에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강연우는 그제야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아아. 강연우가 악보를 흔들며 말을 줄줄 이었다. 요새 밤늦게까지 합주를 하고, 곧 동아리 정기 연주회가 있을 예정이며, 너는 요새 시험기간이라 열심히 공부 중이겠지만 나는 공부 같은 데에 아무래도 재능이 없는 모양인데 노력도 하고 싶지 않아서. 어느 순간부터 강연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나 이미 시작해버린 말을 멈추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김이현은 강연우가 늘어놓는 재미없는 이야기를 표정 변화 없이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짧게 대답했다.

“좋겠다.”

강연우가 절대로 생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합주가 끝나는 늦은 밤이면 강연우는 늘 김이현이 일하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합주 후 뒤풀이가 있더라도 숙취해소제나 헛개수 같은 것들을 사겠다는 이유를 대며 편의점에 들르는 것을 빼먹지 않았다. 정기 연주회가 지나가고 더 이상 새벽녘까지 합주를 하지 않을 때에도 강연우는 김이현을 보러 편의점에 갔다. 강연우는 김이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김이현이 생각보다 말이 많다는 사실이 그 중 하나였는데, 강연우의 질문에만 겨우 대답을 해 주던 김이현은 어느새 묻지 않은 것까지 주절주절 늘어놓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김이현은 습관처럼 한 손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말이 너무 길어졌네 미안,이라고 말했다. 강연우는 그런 김이현의 모습을 볼 때마다 괜히 신이 나서 큰 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웃다가도 문득 강연우는 어쩌다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되었는지 돌아보며 여전히 동그란 김이현의 머리통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김이현은 흡연자였다. 밥 한 끼 값을 아껴서 구매한 담배 한 갑이기에 최대한 천천히 피워야 한다며 김이현은 하루에 딱 한 개비씩만 피웠고, 그건 보통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끝낸 이른 아침이었다. 날이 유독 추운 날이면 김이현은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운 뒤에도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강연우의 얼굴을 때렸다. 김이현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강연우도 거기에 있었다. 가끔 강연우는 혼잣말로 어우 추워,라고 말하고는 김이현의 눈치를 봤다.

“있잖아.”

코가 빨개진 강연우를 보면서 어느 새벽에 김이현은 말했다. 해가 완전히 뜨기도 전이라 세상이 온통 검푸른 색이었다. 강연우는 까만 패딩을 입고 코를 훌쩍이고 있었고, 김이현은 보풀이 잔뜩 일어난 남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김이현이 담배꽁초를 왼발로 밟았다. 조그마한 꽁초 하나를 아주 오래, 힘을 주어 짓이기고 또 짓이겼다. 김이현이 이를 꽉 깨문 게 보여서 강연우는 그 잇새로 튀어나올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우리 집 갈래?”

김이현의 집은 학교 바로 앞 원룸촌에 있는 집들 중에서도 가장 낡은 집의 반지하 방이었다. 누군가 살고 있는 집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부는 단출했다. 도통 이십 대 초반 대학생의 취향으로는 보이지 않는 분홍색 꽃무늬 이불과 베개가 작은 매트리스 위에 곱게 정리되어 있었다. 창문에는 새까만 커튼이 삐뚤게 달려 있었고, 눅눅한 벽지 위쪽에는 곰팡이가 거미줄처럼 엉켜 내려오는 중이었다. 그 순간 어쩔 수 없는 일처럼 강연우는 자신의 자취방을 떠올렸다. 신축은 아니지만 준공한 지 십 년이 되지 않은 오피스텔의 칠 층. 강연우는 자신과 김이현이 들어서자 꽉 찬 현관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김이현은 신발을 대충 벗어 놓고는 강연우의 팔을 잡아 안으로 끌었다. 집안의 가라앉은 공기가 강연우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김이현은 자신의 집에서도 이만큼의 무게를 버티며 살아가는 걸까. 밖에서는 밖에서의 무게를 버티고, 안에서는 안에서의 무게를 버티고.

“넌 부른다고 진짜 따라오네.”

김이현이 코트도 벗지 않고 조그만 냉장고를 열어 캔맥주 하나를 꺼내 바닥에 내려두었다. 크기가 제각각인 머그잔 중 두 개를 아무렇게나 집은 그가 하나를 강연우에게 내밀었다. 받아든 강연우는 컵에 학교 마크가 커다랗게 박혀 있는 것을 알아챘다.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독어독문학과 학생회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김이현이 그 잔에 맥주를 따라 주었다. 새하얀 거품밖에 보이지 않았다. 강연우는 거품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으나 김이현이 멋대로 건배를 하자며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졸업하면 뭐 할 거야?”

느릿한 목소리로 김이현이 말했다. 보일러를 켜지 않은 방 안이 한겨울 새벽녘의 거리만큼 추워서 강연우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맥주를 삼켰다.

“아직은 생각을 안 해 봤는데.”

“전공 살릴 거야?”

“아니. 그러려면 대학원이 필수잖아. 넌 공부가 적성에 맞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

“그렇구나.”

둘은 서로의 말소리를 안주거리 삼으며 각자의 잔에 든 맥주를 빠르게 비웠다. 냉장고 안에는 더 이상 맥주가 없었다. 강연우가 김이현의 집을 나섰을 때, 세상은 이미 환했다. 강연우는 맥주 반 캔에도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랐다. 바쁜 걸음을 하는 사람들 사이로 강연우는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강연우는 김이현의 집을, 그 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떠올렸다. 그때쯤 강연우는 거울 속 자신을 보고 말했다. 미쳤구나, 너.     


며칠 동안 강연우는 편의점에 갈 수 없었다. 김이현을 보면 김이현의 집이 떠오르고, 미끄러운 계단이 떠오르고, 눅눅한 벽지가 떠오르고, 꺼지지 않는 맥주의 거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꿈에서 김이현을 봤다. 김이현의 등 뒤에 커다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존나 불우하고 불운한 새끼. 그 포스트잇의 글씨가 자신의 글씨체와 똑같아 강연우는 악 소리를 질렀다. 꿈에서 깼을 때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엄마였다.     


“일주일 만이네.”

김이현이 강연우를 보자마자 말했다. 아닌가, 이 주? 담담한 어투 사이에 묻어 있는 섭섭함과 서운함이 강연우의 가슴께를 찔렀다. 김이현은 자신의 패를 다 까 보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솔직한 사람이라서 자신의 말 속에 감정을 온전히 담아 드러냈다. 그러면 늘 강연우는 김이현의 감정을 외면하고 싶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유니폼 조끼를 벗고 나온 김이현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강연우는 수입 맥주 네 캔을 종류별로 담은 봉투를 왼손에 들고 있었다. 이거 어는 거 아냐? 김이현이 봉지를 툭 치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영하의 기온에 맥주가 완전히 얼어 버릴지도, 그래서 맥주 캔의 옆구리가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그래도 강연우는 집에 가지 않았고, 김이현이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운 뒤 한참을 서성거릴 때까지도 그 옆에 서 있었다.

“무슨 일 있어?”

김이현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강연우는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의 꿈속에서 김이현 등 뒤에 붙어 있던 포스트잇 한 장이 달랑거렸던 걸 기억해냈다. 그러나 포스트잇은 끝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강연우는 그 포스트잇 한 장을 떼 주지 않았던 것을, 그리고 한참을 생각해 보면 결국 그 포스트잇을 붙인 것이 자기였음을 김이현과 만나지 않았던 일주일 내내 상기시켰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워져서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었다. 강연우는 봉투를 김이현에게 내밀었다.

“너 마셔.”

“뭐야. 얼었을까 봐 그러는 거 아니지?”

김이현이 봉투 안을 들여다봤다.

“나 독일 가.”

“……”

“휴학하고 일 년 정도. 어학연수 겸.”

김이현은 여전히 봉투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답 없이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주머니를 뒤적거리고는 담배 한 개비를 다시 꺼내 들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겨우 그 끄트머리에 불을 붙인 김이현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얼마간의 정적 사이로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그렇구나.”

그 대답에 강연우는 힘이 빠져 자신도 모르게 기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김이현의 그렇구나,라는 대답은 왜 이렇게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지. 강연우는 짧게 친 뒷머리를 매만지다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김이현이 담배 연기를 내뱉는 것처럼 강연우의 한숨은 길고 깊었다.

“좋겠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의 말에는 악의가 없었다. 그래서 강연우는 더 무력감을 느꼈다. 김이현이 봉투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강연우에게 내밀었다. 차가운 맥주 캔에 정말 하얀 눈꽃 같은 것이 끼어 있었다. 성에와 이슬, 그 사이 어딘가, 물이었다가 얼음이었다가 다시 물이었다가 얼음이 된 것 같은 그 눈꽃은 강연우의 손에서 다시 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강연우는 그렇구나,라고 굳이 김이현을 따라하면서 맥주 캔을 땄다. 칙. 캔 뚜껑 사이로 거품이 솟아올랐다.

“가면 공부해? 공부 싫다며.”

“공부도 하고. 근데 놀러 다니겠지.”

“그래.”

담배를 쥔 손으로 김이현은 허공을 향해 건배를 하는 시늉을 했다. 강연우가 맥주를 입에 가져다 댔다. 맥주는 조금도 얼어 있지 않았다. 목구멍을 타고 따끔따끔한 탄산이 흘러내렸다.

강연우가 남김없이 맥주 한 캔을 죄다 비워냈을 때, 김이현은 이미 완전히 비벼 끈 꽁초를 공공 쓰레기통에 버리고 온 뒤였다. 강연우는 그쯤 김이현에게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이제 못 온다고. 휴학하기 전에 본가에 내려가 있기로 했다고. 내 본가가 제주도인데…… 거기까지 말했을 때 김이현은 알아,라며 말을 가로챘다. 그때 강연우는 이 편의점에서 김이현을 처음 마주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러다 김이현의 동그란 머리통을 떠올렸다. 언제나 착 가라앉은 그 잔잔한 머리를. 강연우는 김이현을 보면서도 김이현을 떠올렸다.

그날 강연우는 집으로 향하기 전, 김이현을 품 안에 끌어안았다. 김이현에게서 담배 냄새가 난다고 핀잔을 주면서도 억세게 쥔 팔을 풀지 않았다. 김이현도 담담하게 그의 품 안에서 오래도록 시간을 보냈다. 김이현의 체온이 모든 걸 녹일 정도로 따뜻해서 맥주 캔이 얼지 않았던 것 같다고, 그렇다고, 분명 그런 거라고 강연우는 생각했다.     


쾰른의 한 공원에서 강연우는 김이현이 보내 온 편지 봉투를 뜯어보았다. 라인 강과 사우스 브리지가 한눈에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두 손에 꼭 쥔 채 천천히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몇 문장 없이 간단했는데, 강연우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에 걸맞은 대답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여전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직 벚꽃은 피지 않았다,라는 내용. 그 마지막에는 서툴게 적혀 있는 독일어가 있었다.

Ich vermisse dich.

보고 싶어.

힘을 잔뜩 주어 적었는지 꾹꾹 눌러 쓴 자국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강연우는 그 글자를 오른손 엄지로 쓸어보았다. 우둘투둘한 종이의 흔적이 강연우의 마음 깊숙이 박혀 있었다. 강에 비친 햇빛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날 강연우의 꿈에는 김이현이 나왔다. 김이현의 등에는 Ich vermisse dich,라고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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