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의 따님 김영주 토지문화관 이사장으로부터 번역출판 허락을 받은 나는 각오를 다지기 위해 박경리 선생 묘지를 찾았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4시간여를 가야 통영이다. 통영은 박경리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토지”의 원형이라고도 하는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이기도 하다. 박경리 선생이 돌아가시자 통영의 지자체와 지주들의 주선으로 기념관을 지어지고 그 일대가 박경리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한산도 앞바다가 쭈욱 잘 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하였다. 묘소가 꾸며진 공원 곳곳에 진달래꽃이 피어 있었다. 3월의 봄 햇살이 봉긋한 묘소에 가득하였다. 일본에서 사간 술을 한 잔 따라드리고 이다음에는 일본어판을 읽은 독자들과 함께 찾아뵙겠노라고 하고 내려왔다.
그리고 2년 후 2016년 11월.
토지 1,2권을 만들어 독자들 30여 명과 함께 통영을 다시 찾았다.
文学で旅する韓国의 시작이기도 하다. 바다가 보이는 통영의 호텔 연회장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번역을 한 시미즈 치사코 씨는 물론 토지 완역본 프로젝트를 할 수 있게 경제적 도움을 주신 재일교포 의사 김정출 선생, 통영의 문인들도 많이 참여해주셨고 그리고 강원도 원주에서 김영주 이사장님도 오셨다.
길고 어려운 일을 일부러 선택하여하는 일이니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격려의 말씀들을 해주셨다.
그렇다.
뒷걸음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야 한다. 출판기념회를 마친 다음 날 아침 일찍 일본에서 간 30여 명의 독자들과 함께 박경리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통영에 자리 잡은 출판사 남해의봄날 정은영 대표네가 우리보다 먼저 묘소에 가 돗자리를 펴놓고 제단에는 사과와 배, 술을 준비해 주셨다. 흰 천으로 싸간 토지 두 권을 풀어서 조심히 올렸다. 제단에 올리는 순간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힘든 것이 생각났다기보다 박경리 선생님이 돌보아주고 계시는구나 싶어서였다.
신발을 벗고 돗자리에 올라 큰 절을 올릴 차례였다. 손을 이마에 대고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해야 하는데 큰 절 올리는 법을 잊어버려 머뭇거리자 함께 간 재일교포이자 한국어 잡지 HANA의 발행인인 배정렬 대표가 얼른 나서서 함께 해 주었다. 나는 한 탬포 느리게 배 대표를 따라 하였다. 배 대표는 매번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나를 위기에서 구해 주신다.
함께 간 문학평론가 가와무라 미나토 선생이 생전의 박경리 선생을 만난 에피소드를 모두에게 들려주었다. 30대 때 한국까지 가서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인터뷰는 응해주시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밥을 차려주셨다는 이야기였다. 그 밥이야말로 한국인의 정이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눈물을 훔치셨다. 묘소가 주는 무거운 분위기도 있었지만 70에 가까운 평론가의 회환은 모두를 더욱 숙연하게 하였다. 시미즈상은 자신이 번역한 부분에서 일부를 낭독해 드리기도 하였다.
나는 이 날의 소회를 다음 날 조선일보에 실었는데, 짧은 글이었지만 밤새도록 쓰고 고치고, 고치고 쓰고를 하였다.
책을 만들어 작가의 묘소에 독자들과 함께 와 기념을 하는 일, 하물며 “토지”를 만들어 이렇게 모두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절대 잊지 못할 내 인생의 한 장면이다.
---선생님, 20권까지 잘 만들어 다시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