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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 imagine May 22. 2019

완벽한 하루

A Perfect Day

누군가 내게 물었다. 가장 완벽했던 하루는 언제냐고.

그리고 수많은 날들이 떠올랐다.



- 스페인 카탈루냐 섬에서 들었던 기타 연주

- 하루 종일 생일을 축하하는 이들로 가득했던 전주 여행

- 아침고요 수목원 근처 펜션에서 맛봤던 완벽한 고기

- 후아힌 메리어트 호텔 리조트 잔디밭 요가 수업

- 미노스 섬 골목을 다니다가 발견한 CD 가게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모두 여행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완벽한 하루라고 부르기엔 부족하다. 그날의 기분, 날씨, 관계, 상황에 따라 우연히 선물처럼 받은 시간에 완벽이란 단어를 쓸 순 없으니까. 늘 흐르는 일상 속에 약간의 노력이 더해져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된 그것을 완벽한 하루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아래는 내가 상상한 완벽한 하루다.




아침 여섯 시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어젯밤은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푹 잤다. 누군가 발로 차서 날 깨우지도 않았으며, 울면서 나를 찾는 일도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발걸음이 상쾌하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책을 꺼낸다. 하루에 10분만이라도 책을 읽어야 기분이 좋다. 낮에는 이런저런 일 하다 보면 잊어버리기 일쑤다. 가장 소중한 일을 제일 먼저 해야 한다. 김서령 작가의 따뜻한 글에 위안받고, 맛깔난 음식 묘사에 침이 고인다. 얼른 신랑 아침 도시락과 아이들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겠다. 감자와 달걀을 삶아 만드는 포테이토 에그 샌드위치는 아이들이 아침 식사로 가장 좋아하는 메뉴다. 감자의 온기가 남아 있을 때 먹어야 맛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는 날만 만들 수 있는 메뉴이기도 하다. 아침 준비를 마쳤더니 여섯 시 오십 분. 그제야 남편과 아이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한다. 율양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수학 문제를 풀고, 영어학원 숙제를 시작한다. 아침식사로 딸기, 사과, 오렌지 등 좋아하는 과일과 샌드위치를 나란히 놓았더니 아이들이 제일 좋아한다. 홍이장군과 유산균까지 먹이면 아침 미션 완료다. 아침식사 먹이는 일이 이토록 수월하다니! 기분 좋은 시작이다.


넷플릭스에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영어로 틀어주고, 아침 식사 설거지를 마쳤다. 침대도 제대로 정리해두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 아까 못다 마신 커피를 천천히 삼키며 멍 때려본다. 오전의 커피 향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다. 바쁘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여유로울 수 있는 잠깐이니까.

오전 여덟 시가 되어 텔레비전을 끄고 등원 준비를 시작한다. 세수하고, 양치하고, 옷 갈아입히고, 머리 빗어주고 나니 시간이 좀 남는다. 좋아하는 그림책 한 두권 읽어주고 나면 셔틀버스 올 시간. 자전거 타고 신나게 달려 나가는 율군의 뒷모습이 대견하다. 작년만 해도 어린이집 가기 싫다고 떼쓰곤 했는데, 재밌다니 다행이다. 그렇게 두 아이를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지금부터 내 시간이다.


다행히 거실에는 로봇청소기 두 대가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청소를 하고 있다. 세탁기, 건조기도 돌아가며 빨래 중이다. 간단히 집 정리를 마치고 작업실로 들어간다. 오늘까지 마치기로 한 작업을 정리해서 얼른 넘기고, 다른 일정도 살펴본다. 오늘은 특별히 급한 일이 없다. 장날인만큼 동네 언니와 시장 보러 가야겠다.


요즘은 4일, 9일마다 서는 장날이 기다려진다. 집 바로 앞에 이마트를 두고도 시장에 간다. 아이들 간식으로 옥수수, 꽈배기도 사고, 신선한 야채와 아이들 좋아하는 과일도 산다. 신랑이 좋아하는 명란젓도 여기가 제일 맛있다. 고소한 깨와 참기름을 담는다. 시장에서 먹거리를 빼놓을 순 없지. 이천 원에 푸짐하게 담긴 떡볶이, 순대, 튀김에 기분이 좋아진다. 좋아하는 언니와 이런저런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즐겁다.


어느새 율군 픽업할 시간이다. 시장에서 산 꽈배기 들고 율군 친구와 함께 정자에서 정답게 나눠먹는다.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도 얘기한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에 그저 기분이 좋아진다. 서로 헤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이따 자전거 타기로 약속하고 태권도로 보낸다. 이제 한 시간 자유시간이다. ^^ 잇힝


집으로 돌아와 이메일 몇 개에 답장을 보내고 저녁 준비해야지. 아이들이 제일 좋아라 하는 백숙이 오늘의 메뉴이다. 백숙 끓이고 남은 건 닭죽을 끓여 얼려놓아 비상식량으로 삼을 수 있으니 더 좋다.



일찌감치 아이가 학교 숙제, 학원 숙제를 마쳐놓으면 맘이 편해진다. 숙제하라고 잔소리할 필요도 없다. 얼마나 평온한 저녁인가.


아이들과 함께 저녁 산책을 갔다. 율군은 며칠 전부터 타기 시작한 자전거가 즐거운가보다. 폼이 꽤 능숙해졌다. 아이들과 함께 집 앞 공원을 함께 도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따스한 밤공기, 봄꽃들로 만발한 시간들이다. 오늘은 만 보 이상 걸었다.


씻고 난 뒤, 보고 싶은 책들을 읽어주니 하나둘씩 꿈나라로 빠져든다. 노곤한 잠 속으로 빠져들어간 듯하다. 퇴근한 남편과 도시어부를 함께 보며 많이 웃었다. 도시어부 보면서 고기 구워 먹고, 와인 마시는 일이 즐거움 중 하나였는데... 살이 찌는 듯해서 둘 다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먹지 않고 버텼으니 성공이다!



다시 한번 읽어보니

내게 완벽한 하루는 아이들에게 잔소리하지 않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잘 챙겼다고 생각했을 때, 완벽에 가까운 하루가 만들어졌다.


사실 나는 불량 엄마다. 집에서 급하게 일하고 나가느라 집안일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해야 하는 일을 쳐내기 바쁘니 늘 결과가 엉성하다. 하고 싶은 일은 많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엉성한 일상과 느슨한 관계를 사랑한다. 언젠가 완벽에 가까운 날도 있고, 또 언젠가는 말도 안 되게 엉망인 날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쌓이다 보면 또 다른 완벽한 하루를 꿈꾸겠지. 발리에서 싱잉 볼 소리를 들으면서 명상을 한다거나, 볼로냐에서 가장 맛있는 스파게티를 찾아 떠난다거나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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