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eer 심리학
우리말 중에는 영어로 번역하기 참 난감한 표현들이 꽤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저를 자주 괴롭히는 표현이 “눈치빠르다 / 눈치없다”는 말입니다.
제 영어실력으로는 도무지 정확하게 대치되는 표현을 알 수가 없어서 외국인들에겐 적당히 ‘눈치껏’ 설명해주고는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외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즉, 다른 나라 맥락에는 흔치 않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강하게 표출되는 ‘눈치’에 대해 회사내의 맥락으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눈치없다는 말에 종종 시달리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면 좋겠습니다.
눈치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뜻이 참 어렵습니다.
대놓고 말을 해도 알아채기 어려운게 사람의 마음인데,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알아서 읽어내라니요..
일단 조직생활과 우리 사회에서 왜 눈치가 문제가 되는지 이야기해봅시다.
“High Context Culture”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고맥락 문화’라는 뜻인데요, 명시적인 말, 행동, 규정보다 암묵적인 맥락이 훨씬 중요한 사회라는 뜻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말을 굉장히 직선적이고 단순하게 합니다. 때문에 그 애들 입에서 나오는 yes 는 실제 yes 입니다. 물론 나이먹고 노회한 사람들, 꿍꿍이가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대부분 yes는 그냥 yes 죠.
그렇지만 우리말의 ‘네’는 복잡합니다. 기본적으로는 긍정의 뜻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부정이 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모르겠다 혹은 지금 정하기 곤란하거나 싫다, 심지어는‘긍정이지만 너랑은 말섞기 싫다’, ‘두고 보자’ 등등 거의 무한대의 의미를 실어서 답할 때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죠.
이렇게 말과 행동의 의미에 대해 해석이 많이 필요한 문화를 고맥락 문화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대표적인 고맥락 문화 사회죠.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상대의 기분과 의도 파악 및 상황에서의 적절한 대응 등을 하기 위해서 대단히 많은 정보가 사전에 있어야 하고, 그걸 모두 고려해야 문제를 피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사람 관계가 피곤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 적응이 잘되어 있는 사람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이게 잘 안되는 사람도 많죠. 이런 분들이 ‘눈치없다’는 소리의 희생자가 되는겁니다. (우리가 고맥락사회라는 걸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과거의 ‘예의범절 교육’이 보여줍니다. 단순히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 아닌 ‘적절한 행동이 무엇인가’라는 걸 알려주는 교육을 사회 전체가 해온 것인데요, 이건 어떤 맥락에서 사람을 만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문제가 안되는 행동과 말을 사용하도록 교육을 해온 셈입니다.)
또 다른 우리 사회의 특성은 관계를 중심에 놓고 그때그때 옳고 그른 것을판단하는 관계주의 사회라는 겁니다. 고려대 허태균 교수님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서구식 개인주의와도 다르고, 일본식의 전체주의와도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개인주의 사회는 타인의 시선에 내 말과 행동이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사회입니다. 반면 전체주의 혹은 집단주의는 사람을 전체의 일부분이나 기계의 부품처럼 인식하는 사회입니다. 누군가 방향을 정하면 그에 맞춰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만 수행하고, 그걸 당연시 하는 사회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둘 모두와 다른 관계주의 사회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은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적절성’ 여부가 달라집니다. (내가 술을 술마실 때 친구, 후배, 그리고 높은 상사 앞에서 마시는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세요.)
또 그 사람과 내가 어느 정도의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친한 후배가 시건방진 모습을 보일 때와 친하지 않은 후배가 동일한 행동을 할 때 여러분의 기분 상태를 생각해보세요.)
이렇듯 관계의 맥락에 따라 정답이 달라지기 때문에 ‘적절한 행동’에 대한 기준선이 복잡하고 높을 수밖에 없고, ‘눈치가 없는’ 사람이 양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원체 복잡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튀는 돌이 정맞는다' 같은 패배주의적 속담이 널리 퍼질 수밖에 없죠.
회사는 기본적으로 대표이사가 통제하는 독재국가이지만, 우리나라는 그 정도가 좀 더 심합니다. 윗사람으로서 가지는 공식적 권력에다가 유교의 군사부일체 사상에 일제시대와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끝없이 강요되었던 군대식 권위주의 문화까지가 모두 결합되어 있는 조직이 바로 회사죠.
우리 기업들, 특히 제조업체들의 경쟁력 확보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한게 군대식의 일사불란함이지만, 경제 규모가 커지고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경제의 추가적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는 조직문화입니다.
이런 조직문화를 단순화하면 오와 열을 맞추는 문화입니다. 이 말인 즉슨, 내가 잘해도 주변의 배치와 맞지 않으면 무조건 틀린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이렇게 움직이려면 나의 전후좌우를 계속 살피면서 맞춰가야 합니다. 나의 의견이나 능력, 개인적인 상황보다도 전후좌우에 맞춰야 하는 문화. 업무 속에서 이것이 펼쳐지는 것이 바로 눈치입니다.
각 개인이 얼마나 좋은 생각을 해내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전체와 맞췄느냐 아니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거기에 잘 맞추는 사람이 곧 눈치 빠르고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비난을 받는거죠. ‘눈치껏 행동해라’ 라고 말이죠.
눈치없는 사람을 위한 조언을 드리기 전에 하나 더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바로 눈치의 심리적 배경입니다.
심리학에 눈치라는 말은 없습니다만, 상대적으로 상황을 잘 파악해서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에 대한 설명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눈치 빠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머리가 좋고 감성지능 (EQ)도 높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상황에 잘 맞춰 능숙하게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단지 ‘정신적 순발력’이 좋은 것일뿐 지능이나 관계를 만들어가는 능력과는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분명히 상황에 맞춰 빠르고 적절하게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주변인들에게 ‘상황을 주도하는 능력이 있다’고 인식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능력은 단순히 ‘정신적 순발력’이 높아서 발휘되는 것일뿐 지능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구요,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순간순간 대응을 잘한다고 해서 남들보다 더인간관계를 잘 만들어 가거나 타인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실제로 여러분들도 주변의 눈치빠르다는 평가를 받는 동료들을 잘 생각해보시면 그들의 눈치빠름이나 상황대응력이 그들의 전체적인 업무 평가나 신뢰도같은 장기적 평판,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다는 점을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Source: Quick Thinkers Are Smooth Talkers: Mental Speed Facilitates Charisma, William von Hippel 외, 2015)
그럼 어떻게 해야 '눈치'가 생길까요?
1. 눈치없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무례한거!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도 꽤 있을테지만, 군대도 아닌 회사에서 반드시 분위기에 맞춰 알아서 적당히 행동하라고 타인에게 압력을 주는 건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정도가 너무 심해서 조직내에 분란을 일으키거나, 동료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거나, 주변 사람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까지를 옹호하는 건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한 개인이 성격과 신념에 따라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조금 더 관대하게 사람들을 그 모습대로 지켜봐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행동이 타인에게 직접적인 위해나 공격이 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때문에 ‘눈치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 분들도 조금 더 당당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일에 정도가 심하게 눈치가 없다면 그건 개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이슈가 될 수도 있습니다만(관련글: https://brunch.co.kr/@curahee/1) 매번 알아서 딱딱 맞추지 않는다고 해서 듣는 비난은 그저 호사가들과 입가벼운 사람들, 그리고 과도한 충성 경쟁이 만들어내는 무례함일 뿐입니다. 휘둘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2. 그래도 눈치없다는 소리는 싫다면 주변에 부드럽게 알릴 것
성격상 반응이 느리거나 주변에 대한 관심이 좀 적은 분들이 있습니다. 혹은 생각이 무르익기전에는 말이나 행동을 최대한 신중히 하시는 분들도 계시죠. 이런 성향을 가진 분들은 상황에 따라 ‘둔하다’ 혹은 ‘눈치없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굳이 사람들에게 나의 이런 성격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 싶으시겠지만, 주변에‘내가 조금 조심스러운 성격이다’ 정도의 내용으로 부드럽게 이야기 해놓으시면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이 때 표현은 자기비하의 느낌이 나지 않는 단어를 선택하시는게 필요하고, 주변에서 내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에게 알리는게 좋습니다.
평소 그렇지 않은 듯 말하면서 순발력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분명 투덜거리거나 핀잔을 주는 사람이 나오게 됩니다만, 자신의 약점(사실은 약점이 아니고 그냥 특성입니다만)을 미리 인정해놓으면 약점이 아니게 됩니다.
연차와 경험이 쌓이면 분위기를 이끌지는 못해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기술이 생기니 아직 경험이 많지 않으시거나, 새로운 조직에 가신 것이라면 이렇게 약간 개방적으로 자기에 대해 이야기해두는 것도 좋은 전략입니다.
3. 대응의 속도를 높이는 연습을 할 것.
개인의 특성일 뿐, 큰 문제는 아닙니다만 업종이나 직무에 따라서는 순발력 있는 대응이 필요한 곳들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영업 등 사람을 많이 만나거나, 마케팅처럼 남들 앞에서 분위기를 이끌어야 하는 직무들이 대표적일 것 같습니다. 혹은 중간관리자가 되어 직원들을 대표해서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분들도 어느 정도의 분위기 파악 & 주도 능력은 필요해집니다.
천천히 차분하게 분위기에 이끌리지 않고 대응하는 것도 좋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눈치빠르게 분위기를 끌고 가는 능력을 갖추는 것도 좋겠죠. 이땐 ‘정신적 순발력’를 높이려고 노력하시는게 도움이 됩니다. 상대방의 말에 좀 더 빨리 반응을 보이고, 상대의 상황을 보고 미리 필요한 것들을 하나 더 준비해 보는거죠.
앞서 이야기드린 것처럼 눈치 혹은 상황을 이끌어가는 능력은 지능 등과는 관련없는 ‘기술’적 영역에 더 가깝습니다. 의식적으로 노력하면 어느 정도의 학습은 가능하다는 뜻이지요. 다만 이 노력이 개인에게 너무 큰 스트레스로 돌아온다면 그냥 스스로의 모습에 계시길 더 권장합니다. 진솔한 태도가 눈치빠른 것보다 장기적인 신뢰 관계를 만드는 백배는 중요하니까요.
4. 다양한 환경 속에서 무언가를 책임지는 위치에 스스로를 노출시켜볼 것
아무래도 새로운 상황, 처음 접해본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되면 사람을 위축되게 만들고, 반응 속도를 떨어뜨리는 작용을 하기 쉽습니다. 때문에 경험이 축적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죠. 그리고 새로운 상황에 스스로를 노출시킨다고 해도 그저 참여자로만 가서는 배울 수 있는 부분이 아무래도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친구들 모임이든, 동호회자리든, 회사 동기모임이든, 혹은 부서원들간의 생일 축하 모임처럼 작고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자리들을 스스로 주최자가 되어 ‘책임’ 지는 경험을 해보면 상황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학습이 많이 됩니다. (계속 이야기드리지만 이런 과정에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회의적 의문이 많이 드신다면 안하는게 정답입니다.)
책임자로 모임을 이끌어보면 모임의 진행과 참석자의 성향과 역할, 모임의 단계와 목표 등 전체 그림을 조망하는 능력이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눈치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된 학습을 차츰 회사의 공식적인 자리에도 적용해보기 시작하는거죠. 처음 작은 모임을 만들어보는게 조금 어색하고 불편하겠지만 몇 번 정도만 해보면 곧잘 할 수 있게 됩니다.
눈치없는 건 아주 문제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냥 개인의 성향이고, 성격입니다.
그걸로 남에게 기죽을 이유도 없고, 남들도 여러분을 비난할 이유도 없죠.
다만 회사생활에서 눈치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이 크거나, 스스로 조금 개선해보고 싶으시다면 ‘정신적 순발력’을 높이는 연습을 하시고, 이 연습의 가장 좋은 방법은 작은 모임과 관계를 책임지고 이끌어보는 것입니다.
1. 슬기로운 직장생활 페이스북에서 더욱 다양하고 현실적인 커리어 이야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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