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후배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대표님께서 제조업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자기 희생적 태도가 몸에 배여있지 않으면 불리한 산업이기 때문에 이 세대 이후 경쟁력이 낮아지게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고 말씀하셨는데 반도체, 배터리 등 제조업 기반이 많은 국내 기업들이 대전환의 시기에 어떻게 경쟁력을 갖추고 전설적인 기업에 근접할 수 있도록 도약할 수 있을지 대표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이하 내 생각 정리.
우리나라 노동자나 엔지니어들의 능력을 보여주는 일례중에 K-9 자주포나 KF-21 전투기의 생산기술 관련된 이야기들이 있는데, k-9의 경우에 차체 절단, 용접, 드릴링 및 체결 작업 등이 자동화되어 있는 모양인데, 이런 장비들은 한화가 자체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경쟁사들도 유사하게 만들거나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는 기계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장비를 이용해서 한화는 한 해에 240대 내외의 자주포를 만들 수 있다는데 독일 등의 경쟁사는 한 해 10대도 못만든다고 한다. 물론 생산라인이 몇 개 깔려 있고 라인이 활성화 되어 있느냐라는 기본적 크기 차이도 크겠지만, 이런 걸 보면 유사한 기계라고 해도 운영 노하우 차이가 분명 있는 것.
유사한 사례로 KAI 가 KF-21의 생산에 사용된 FASS 라는 동체자동결합시스템 적용 사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전투기의 경우 설계도 문제지만 조립 품질이 매우 중요한 모양인데, 그걸 위해서는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서 만들어지는 비행기 동체를 정확히 align 시키고 정확하게 드릴링 및 연결부 체결이 중요하고 이 기술을 KAI에서는 KF-21 개발을 위해 첫 도입했는데 KF-21의 품질도 문제가 없고 이 생산기술을 이미 FA-50 등 다른 항공기 생산에도 잘 써먹어서 일주일 이상 소요될 일을 반나절로 줄이는 식의 생산성 향상을 가져왔다고 한다. 반면 미국 보잉의 경우 FASS를 쓰려고 시도했다가 오히려 기존 라인 운영과 충돌해서 생산성이 후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함.
우리나라 제조업체들, 특히 대기업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동화율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위의 예시에서 보듯 아무리 자동화가 이루어져도 결국 엔지니어와 노동자들의 역량과 내재화된 노하우에 따라 차별적 생산성이 가능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 결국 우리나라 제조업체들이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할 경쟁력 확보의 기본 방식은 이처럼 높은 자동화율과 운영 노하우의 결합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만으로 전설적인 회사가 될 수 있느냐하면 세 가지 이슈가 여전히 있다. 하나는 이렇게 한다고 해도 고객의 요구에 대한 대응 능력면에서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점, 두번째는 애초에 혁신적 아이디어나 기술에 기반한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할 경우 대응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내 대기업 특유의 사업 구조로 인한 고객과의 이해 충돌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점 등이다.
우선 고객의 요구에 대한 대응 능력 : TSMC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TSMC의 수많은 장점들 중에서 언제나 언급되는 장점이 '고객의 작은 요구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제조업체들도 고객 요구에 잘 대응해주는 편이니 지금까지 발전해왔겠지만, 국내 B2B 제조업체들이 이 부분에서 분명 예전보다 취약해진 것은 분명하다. 흔히 고객 요구에 너무 반응하는 구조를 만들다보면 나오는 이야기가 '원가가 불리해진다'와 '인건비 싼 대만이니까 가능한 방식'이라고 하는데, 이 둘이 진짜 맞는 이야기라면 TSMC의 40%가 넘는 영업이익률은 성립하면 안된다. 우리나라 인건비가 북유럽 수준이라면 이런 한탄도 해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단순한 Scale economy에만 집중해왔지 '복잡성을 핸들링할 수 있는 단순함'을 추구해 왔는지는 반성이 필요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애초부터 복잡한 고객 요구에 빠르게 대응하도록 조직을 설계, 운영해왔으면 인건비 상승이나 일이 복잡해지는 것에 대해 비용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 제조업체들이 충분한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혁신적 아이디어나 기술에 기반한 경쟁자 등장시 대응 능력 : 당연히 혁신적 플레이어가 등장하면 제대로 대응을 못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우리나라 제조업체들의 새로운 도전에 대한 대응 능력은 전설적인 면들이 있었다. 단적인 예시로 갤럭시를 6개월만에 만들어내서 출시해내지 못했으면 우리나라 핸드폰 사업은 노키아와 똑같은 운명이었을거다. 문제는 지금처럼 젊은 인력이 줄어들고 예전과 다른 기업 문화하에서도 이런 형태로 순발력있게 대응하는게 가능하냐다 (사실 이건 순발력이 아니라 경영진이 방향 잘못 잡았다가 발등에 불 떨어져서 직원들 갈아서 위기를 벗어난 것에 더 가깝다.) 예전처럼 못 갈아넣는 상황이라면 경영진이 진짜 방향을 잘 잡고 혁신을 치고 나가야 한다. 이 점에서 삼전이 최근 AI를 모든 장비에 넣겠다고 결정한 것이나 현대차의 전기차 관련 대응 과정, 하이닉스의 HBM 등을 보면 충분한 능력이 있는 경우도 있어보이지만 그 외의 사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방향을 잘잡는다는 것은 가령 스페이스X가 1단 로켓 재사용에 10년 넘게 집중하다보니 전세계 최고의 가격 경쟁력을 갖추게 된 사례를 의미한다. 수많은 로켓 기술을 개발하다가 하나가 찾아진게 아니라 거의 초창기부터 재사용에 집중했고 그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런 방식은 하나의 가설을 가지고 이 부분에 경쟁력을 집중해서 결국 시장을 혁신하는, 전형적인 스타트업 방식이다. 대기업은 이런 식의 '도박적'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특히나 경영자의 상상력이 부족한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앞으로도 이런 식의 혁신 업체들은 더욱 많이 등장할 것인데, 과연 그 때마다 우리나라 제조 업체들이 따라갈 수 있을까? 혹은 처음부터 시장을 혁신할 아이디어에 집중해서 시장을 리딩할 수 있을까?
고객과의 이해 충돌 가능성 :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예전보다는 훨씬 더 선택과 집중을 한 상태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하나의 사업에 대한 집중보다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대응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단적으로 삼전은 스마트폰과 AP에서는 애플과 경쟁하지만 메모리와 파운드리에는 경쟁사다. 글로벌 대형 업체들이 하나의 중심 사업에 생태계를 구성하는 식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든다면 우리는 그것보다는 훨씬 다종의 사업을 운영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사업에서 글로벌 스케일이기보다 여럿을 합쳐서 글로벌 경쟁사 규모가 되는 방식. 분명 이런 포트폴리오 구성도 장점이 많지만 갈수록 사업 환경이 복잡해져가는 이 시기에 제조업체에게 과연 이런 방식이 적절할까 싶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하나의 기업체는 하나의 사업만 영위해서 글로벌 규모가 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많은 편이다.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은 강력하고, 지금까지 잘해온 것도 분명하지만 갈수록 젊은 인력 채용이 어려울 것이고 예전처럼 갈아넣는 문화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우며, 자동화에 아무리 투자를 한다고 해도 여전히 특별한 노하우나 기술이 없다면 갈수록 고도화되는 중국 등의 업체와 경쟁하는데 분명 한계가 계속 드러나게 될거다. 그리고 높은 자동화율은 특정 생산 방식이나 특정 기술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서 혁신적 플레이어가 등장했을 때의 대응력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문제도 생긴다.
내가 생각하는 결론은 한국의 대기업, 특히 제조 대기업들도 갈수록 스타트업처럼 하나의 분야에서 집중해서 이 하나의 사업을 글로벌 수준으로 키워내는 방식이 아니라면 경쟁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 방식은 분명 기존의 대기업 문화와 다르고, 리스크도 더 커지고, 무엇보다 기존 사업 포트폴리오의 재구성 또는 구조조정을 전제하기도 하는 선택이라서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업계 2~3등 수준에서 '규모의 경제에 따른 생산성'으로 승부하는 업체와 그런 국가로만 남아 있게 될 것이고, 이래서는 외부의 영향력에 경제 전체가 휘둘리는 모습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