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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Jun 06. 2019

정부 지원금 제도의 함정

마케터, 정부지원금 그리고 창업

코칭 등의 일로 초기 창업자들을 만날 땐 그 사람이 창업 전에 가지고 있던 직업에 대한 선입견을 최대한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창업이란게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성공의 길이 무언지 항상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꼭 한 직무 출신만은 약간 삐딱한 시선에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마케팅 출신, 특히 대기업 마케팅 출신입니다.  

저 또한 마케터 출신이다보니, 경험이 있는 만큼 더 집요하게 확인하는 것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런 선입견은 마케팅 직무 그 자체보다는 '마케터가 조직에서 일을 잘 하는 방법'과 창업 사이에 간극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기업 마케터에게 중요한 것은 '예산'입니다.


고객을 이해하고자 하며,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아이디어를 생각한다는 점에서 마케터들은 훌륭한 창업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제가 삐딱한 시선을 두는 지점은 마케터의 역량이 아닌, 기업에서 마케팅이 이뤄지는 과정입니다.


많은 경우 마케터, 특히 연차가 좀 있는 마케터에게는 “마케팅 예산”을 따내는 것이 아주 중요한 업무가 됩니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고, 실행력이 좋아도 예산 지원이 없으면 기업체 마케터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고, 특히나 대기업에서는 예산을 못 따내는 마케터는 존재 이유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경영진을 설득해서 연간 마케팅 계획을 승인받고, 예산을 따내기만 하면 이미 할 일의 반 이상을 했다고 보는 성향이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이 경향이 좀 더 강해지면, “마케팅 = 예산” 이라는 시각까지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일 잘하는 마케터는 쓸 수 있는 돈을 잘 가져오는 마케터인거죠.  


이를 위해서는 정교하게 짜여진 계획이 있어야 하고, 돈을 투입했을 때 효과가 얼마쯤 나올 것이라는 소위 기대효과 또는 마케팅 ROI 논리를 정교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기업은 대체로 예산이 많기 때문에 거대한 금액을 조기 투입해서 소비자들의 눈을 붙잡는 전략을 선호합니다. 단기간에 확실한 리턴을 기대할 수 있고, 시장 반응이 좋지 않은 경우에도 일단 인지도만 쌓이면 영업력 혹은 채널 장악력으로 일정 수준의 매출을 만들어낼 수 있거든요.   



설득대상이 정부와 투자자로 바뀐 것 뿐,
습관은 그대로입니다.


많은 마케팅 출신 창업자들이 이 논리를 그대로 창업 과정에 투사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설득의 대상이 대기업 경영진에서 정부지원금 혹은 VC 등의 투자자로 바뀐 것 뿐이죠. 이들은 아주 그럴싸한 그림을 비즈니스 모델로 만들고, 이 사업을 어떻게 단기간내에 성공시켜 낼 수 있느냐만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지원금을 따내면 사업의 반 이상은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렇게 훈련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지원금을 받았다고 해봐야 스타트업이 하는 마케팅은 정말 얼마 안되는 예산입니다. 가령 TIPS 같은 프로그램으로 한 5억원쯤 지원/투자 받았다고 해봐야 제품 개발 비용과 운영비 제외하면 마케팅 비용은 불과 몇 천 만원 수준이고, 이 돈은 한 두번 효과없는 일에 투입하면 그냥 사라져 버리는 돈이죠.


대기업은 마케팅 캠페인이 기대하는 효과를 얻지 못하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존에 보유한 채널 장악력과 영업 능력을 통해 여전히 일정 수준의 매출을 확보해낼 수 있고, 이렇게 시장에 깔아 놓으면 고객 반응이 다시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스타트업은 영업력이나 채널 장악력 따위가 있을리가 없죠. 마케팅 계획에 올인했다가 실패하면 그냥 그걸로 게임 끝이라는 뜻입니다.


때문에 완벽하고 멋진 계획을 세워 한방에 왕창 예산을 투입하는게 아니라 조금씩, 야금야금 그리고 끈질기게 작은 시장에 집중해서 ‘예산을 최대한 쓰지 않는’ 마케팅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패하는 경우 다른 대안들을 계속해서 실험해볼 수 있고, 소수라도 팬이 생겨나야 비벼볼 언덕이 나오죠. (이런 방식의 접근을 이 동네 용어로 “lean startup” 혹은 “growth hacking” 이라고 합니다.)

 

대기업에서 캠페인 혹은 프로젝트 당 최소 수천만원에서 수십억원씩 계획하고 써대던 사람 입장에서 이런 식의 작고 소꿉장난같습니다. 게다가 귀찮고 번거로운데다 모양새도 안나오니 재미도 없습니다. 마케팅 효과 또한 천천히 나옵니다. 그래서 마케팅 올인 후에 실패하면 더 큰 지원금을 위해 다시 마케팅 계획을 세우고 피칭과 IR 을 하러 다닙니다. 하지만 대기업의 제품개발력과 영업 능력이 없는 스타트업에서 이런 접근법은 그냥 도박에 불과하죠. 대부분은 실패하고 그 스타트업은 좀비가 됩니다.  



완벽한 계획과 단기적 성과를 부채질하는
정부 지원금 제도


저는 정부가 나서서 스타트업들에게 지원금을 주는 것을 매우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지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정부 지원금 운영 방식은 대기업 임원들이 자사의 마케터들에게 ‘완벽한 계획’과 ‘단기적 성과’를 요구하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역량도 부족하고 가진 것도 얼마 없는 스타트업들은 차분하고 집요하게 자기들의 아이디어들을 시장에서 다양하게 실험하면서 성과와 팬들을 만들어가야 하지만, 지원금을 받으려면 그리고 받고 난 후엔 이런 행보가 아니라 한방에 올인해서 단기적으로 뭔가 그럴싸한 것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정부지원금은 ‘제품을 사랑해주는 백명의 작지만 확실한 팬을 가졌다’는 말보다는 “다운로드 십만번” 혹은 “유명 기업과 콜라보” 같은 것들에 점수를 훨씬 더 주거든요. 결국 정부지원금이 스타트업의 사업 리스크를 오히려 키우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 실행하지도 않을 계획만 그럴싸하게 세우고, 필요하지도 않은 4차산업혁명같은 기술적 요소 집어넣다보니 사업 포커스가 날라가 버리거나 페이퍼웍 하느라 시간 낭비하는 것은 아예 논외로 칩시다. 이것까지 포함하면 정부지원금은 ‘국민 세금으로 만든 스타트업용 마약’이라는 말을 부정할 수가 없으니.)


창업의 과정은 성공을 위한 도박이 아닙니다. 창업은 단지 맛있어 보이는 요리를 예쁜 접시에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요리를 선보이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레시피를 실험하고, 그릇도 닦고 가게도 청소하며 손님이 오지 않아도 고독하게, 하지만 끊임없이 개선하고 노력하는 과정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오직 시장에서 고객에게 임팩트를 주기 위해 치열하게 가설을 세우고, 리스크를 최소화 하며 검증하는 것 만이 필요합니다. 돈을 따내기 위해 투자자를 설득하고 임원진을 홀리는 것이 아니라요.


마케팅 예산을 따냈다고 마케터의 업무가 끝난게 아닌 것처럼, 지원금을 따냈다고 사업에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리스크를 감당할 수 없는 한방 작전은 그냥 절벽에서 뛰어내려 운좋게 나무가지에 옷이 걸리기를 기대하는 전략입니다.


스타트업의 전략은 고민을 통해 만들어낸 작은 실험들을 감당할 수 있는 리스크로 시장에서 수행하고, 이를 커다란 성공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미친듯이 매달리는 집요함의 산물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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