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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성규 Nov 12. 2018

11. 중국어, 무조건 듣는 게 먼저.

아이들과 함께 걷는 세상. 11


3년 전 상하이로 무작정 나를 따라온 아이들에게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24년 동안 중국어를 배우고, 말하면서 느낀 노하우를 이제 막 상하이로 온 아이들에게 전수를 해 줄 때가 된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아이들이 중국어를 어떻게 배우고, 내가 어떻게 보조를 했었는지, 나만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방법을 이야기할까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방법은 지극히 내 개인의 경험에 따라 생각한 방법이라,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이 된다고 확신하지는 못함을 미리 밝힌다.

-내용 중에 나오는 교재의 이름은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나 어찌 되었건 광고의 목적은 전혀 없음을 사전에 알리는 바이다.-


중국어를 조금도 할 수 없던 작은 아들 누리는 상하이로 오자마자 벙어리가 되었다.

어디를 가든 안심이 되지 않았고, 혼자 내 보낼 수도 없었다.

중국어를 빨리 가르치고 싶었지만, 급하게 배워서 단지 생존 중국어로 남게 되는 것 역시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중국어를 배웠던 기억을 떠올려 차근차근 단계별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 무조건 듣자. 그러고 나서 이해하고, 외우자.


10년도 더 전에 한국에 잠시 머물 때였다. 서점에서 책을 뒤적이던 중 한 중국어 교재에 눈이 갔다.

'중국어 그냥 막 따라 하기'(특정 광고가 될 수도 있어서 정확한 도서명은 피했다. 하지만 비슷하다. 아주.)라는 책이었는데 내가 중국어를 배우며 느꼈던 방식으로 중국어를 배우는 책이었다.

24년 전 중국에 와서 처음 시작했던 중국어 교재가 '汉语会话301句:한어 회화 301구'라는 책이었다. 그때는 책 부록으로 카세트테이프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중국어 회화에서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301개의 구를 중심으로 대화 형식으로 풀어낸 교재였다. 지금이야 한국에서도 번역이 되어 나오고 흔히 볼 수 있는 책이지만, 그때는 오로지 영미권 외국인의 중국어 교육을 위해 북경 어언대학에서 만들어진 교재였기 때문에 책에는 중국어와 영어로 된 해석만 있었다. 해석도 나에게는 그냥 다 외국어였다.

테이프를 틀어놓아도 도대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책을 봐도 뭔 말인지 알 수 없었는데, 그나마 몇 개 있는 삽화는 대화를 하는 것이 무슨 상황인지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을 만큼 빈약했다.

그 당시 책 값이 5원인가 했었는데, 책은 펼쳐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 책 값이 아까워서 그냥 아침마다 그 테이프를 틀어 두었었다. 그냥 아침을 시작하는 배경음악 정도로 틀어 두었는데, 이 테이프라는 것이 내가 골라서 듣고 싶은 것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 틀면 그냥 계속해서 무작정 들어야 하는 하는 것이라. 아침이 되면 그냥 습관적으로 테이프를 눌러 두고 나오는 대로 들어야 하는 게 하루의 시작이 되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들었을까? 예전에 카세트테이프를 줄기차게 들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질 떨어지는 테이프를 오래 듣다 보면 테이프가 어떻게 되는지. 바로 테이프가 늘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배경음악으로 틀어 놓던 거라 말이 늘어지건 어쩌건 그냥 습관적으로 틀어 놓았다. 그런데, 테이프가 늘어지면서 말하는 속도가 늦어지니 무슨 말인지는 여전히 몰랐지만, 어느새 내가 천천히 그것을 따라 흥얼거리고 있었다. 순간, 내가 흥얼거리고 따라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확인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책상 구석에 버려져 곱게 쉬고 있던 301구의 교재를 펼쳐 들었다. 내가 흥얼거리고 있는 페이지를 펼쳐 들고 그 아래에 있는 영어 해석을 대충 읽어 보고는 내가 흥얼거리던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일 내가 흥얼거릴 수 있는 문장들의 뜻을 알아 나갔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테이프를 듣고 흥얼거린 지 한 달, 그 뜻이 무엇인지 알아본 게 다시 한 달. 그렇게 두 달이 지나자.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하는 말들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이미 301 구라는 책에 있는 모든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입 밖으로 내어서 내가 말로 하지는 못했고 들을 수만 있는 상태였다.

나는 바로 아래층에 사는 단기 유학을 하는 메구미라는 이름의 나이가 지긋한 일본 아주머니와 스터디를 하기로 했다. 새벽 6시에 만나서 30분간 301구에 있는 대화를 외우고 서로 대화를 하자는 것이었다.(이때, 일본 사람이 하는 중국어 발음이 어떤지 확실히 깨닫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두 달 동안 301구를 외웠고, 메구미는 회사에서 보내준 유학 기간이 끝나 일본으로 돌아갔다.

메구미가 떠나면서 HSK 시험을 못 보고 간다며 아쉬워했는데, 그때서야 외국인을 위한 중국어 평가 시험이라는 HSK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바로 시험 접수를 했다. 주변에 같이 중국어를 배우던 사람들이 중국어 4개월 배우고 HSK 시험을 치는 것은 접수비만 낭비하는 것이라며 하나같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당시 HSK 시험은 지금과 달리 1급부터 11급까지 나누어져 있었는데, 1급부터 8급까지는 같은 시험지로 시험을 쳐 일정 점수가 넘으면 등급이 나누어지는 시스템이었다. 물론 9급부터 11급까지는 고급 시험이라고 해서 시험의 내용 자체가 달랐다.

나는 워낙에나 사람들과 교류가 없었던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시험을 등록한 뒤 시험을 치렀는데, 4급을 받았다. 그 당시, 5급을 받으면 어문 계열의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HSK 시험의 급수를 받고 나자 여전히 말을 잘하지 못했지만, 중국어라는 것에 조금은 자신감이 생겨났다.

나는 4급을 받고 난 후, 단어만 죽어라고 외우기 시작했다. 단어를 외우면서, 권설음과 설치음(지금은 부르는 명칭이 바뀐 걸로 알고 있는데, 뭐하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이라고 하는 중국어 특유의 발음 공부도 집중적으로 했다. 하루에 6시간 이상을 단어만 외우다 보니, 2개월 만에 301구에 있는 대부분의 단어를 다 외울 수 있게 되었고, 이미 늘어질 대로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와 너덜너덜 헤어진 301구 책을 버리고 900 구라는 책을 다시 구입한 뒤 같은 방식으로 책을 보았다.




중국어는 성조라는 것이 있어서 같은 발음이라도 성조를 조금만 달리 발음해도 그 뜻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중국어를 공부할 때 힘들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성조를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성조를 누구한테 제대로 배워보지는 못했다. 내가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들어간 중국 학교는 초급 중국어 강의는 없고, 중급과 고급 과정만 있는 곳이었다. 주로 한국에서 중문과를 전공했거나, 아니면 전공하고 있는 사람들이 방학기간을 이용해 잠시 단기 연수를 받는 학교였기 때문에, 중국어의 성조와 발음도 모르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중급반에 들어가 알지도 못하는 중급 중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강의 대상이 기초는 다 하고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성조나 발음은 하루 만에 끝나 버렸고, 내가 제대로 배운 성조는 그냥 301구 테이프에서 나오는 리듬뿐이었다. 리듬을 배우고, 단어를 암기하고 나니, 이게 몇 성인지 알지 못해도, 습관적으로 제대로 된 성조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실,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가 이게 몇 성인지 물어보면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성조는 앞뒤에 어떤 성조가 오는가에 따라 변동이 심한 편인데, 나름 규칙이 있는 것 같지만, 나는 그냥 습관적으로 발음을 하다 보니, 성조 변화의 규칙을 물어 오는 때가 가장 곤혹스럽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그 당시 그래도 1 성부터 4성까지의 성조는 어느 정도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에, 중국어 0부터 10까지 숫자의 발음을 선생님께 녹음을 부탁하여 녹음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듣고 중얼거리며 거기에 나오는 성조만 익혔다. 1은 1성, 2는 4성, 5는 3성, 10은 2성. 그렇게 이, 얼, 싼, 쓰, 우, 리우, 치, 빠, 지우, 스를 성조에 맞추어서 리드미컬하게 노래하듯 외웠다.

0부터 10까지 누가 툭 건드리면 바로 나올 수 있을 만큼 외운 후, 나는 그것을 다시 10부터 0까지 거꾸로 외우기 시작했고, 그것 또한 능숙하게 읽을 수 있게 되자 십 단위 백 단위의 숫자를 노래하듯이 외웠다.

사실 내가 숫자를 외우게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다.

중국어에 와서 중국어를 배운 지 두 달 즈음되던 어느 날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소에 있던 나는 어떤 아주 작은 중국 꼬마가 집에 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버스 번호를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는데, 거침없이 숫자를 말하는 게 너무나 부러웠다. 나도 옆에서 조용히 따라 해 보았지만, 혀가 말리고, 입이 꼬여서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6개월 내에 모든 숫자를 정확하게 발음하겠다는 작은 목표를 세웠던 것이다.


그렇게 숫자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자, 나는 내가 흥얼거리며 따라 하던 말들의 성조가 몇 성인지는 대충 감이 왔다. 물론 숫자를 공부하면서 한국 사람이 발음하기 힘들다고 하는 권설음과 설치음도 함께 공부를 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24년 중국 생활을 버티게 해 준 내 중국어 실력은 모두, 301구와 숫자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생활한 지 10년이 지났을 무렵, 나는 HSK11급을 무난히 따냈고, 학교를 졸업한 뒤, 전공과는 상관없는 어느 외국계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중국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함께 있던 한국인 후배가 조금은 질투가 섞인 말투로 무시하듯 나에게 이야기했다.

"형이 하는 중국어는 301구 빼면 아무것도 없어요."

같이 있던 중국사람들이 후배의 중국어에 비하면 나의 중국어가 월등하다는 말에 심술이 났던 것이었다.

그때 그 옆에 있던 중국어의 달인이었던 다른 한국인 친구가 한마디 했다. 

"그럼, 너는 그 301 구도 못한다는 말이네?"

그 후배는 그 당시 중국 명문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던 유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 1등을 하는 장학생이었다.

사실 자신의 중국어 실력이 더 뛰어남을 말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자신의 중국어가 301구 보다도 못하다는 말을 듣게 되자 상당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냥 자리를 떴던 기억이 있다.


나의 중국어 실력은 301구에서 시작한 것이 사실이고 모든 나의 표현법이 거기서 시작했다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는 시간 동안 내가 쓰던 중국어는 그 301개의 구가 바탕이 되어 변화와 응용을 통한 풍부함이 더해 있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발견한 '중국어 그냥 막 따라 하기(^^)'라는 중국어 교재는 그 시절 내가 301구를 가지고 공부를 했듯이 테이프도 있었다. 내용은 정말 심플하다 못해 불 친절하기까지 했다. 그냥 중국어 문장을 중국어로 두어 번 읽어 주고, 한국어 해석을 한 번 읽어 주는 것이었다. 문법도, 규칙도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 교재가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나는 중국어를 하나도 하지 못하는 누리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벼리에게 까지 이 중국어 교재를 사용하여 중국어를 무진장 듣게 했다. 보는 게 아니고, 쓰는 것도 아니라 그냥 듣기만 하는 것이다.


작은 아들 누리는 중국어를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냥 그 따라 하기를 듣기만 들었다. 어차피 전부 모르는 단어들이고 사전을 이용해 찾는 방법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듣기만 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를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그냥 배경음악처럼 중국어를 틀어 놓았다. 그렇게 1주일 정도 지나자 한 두 마디 정도를 따라 하게 되었다. 내가 듣던 301구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어로 해석이 한 번씩 나오니 자기가 중얼거리며 따라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책을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읽거나 쓰는 것은 못했다. 단어를 외우거나 책을 보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사실 이게 제일 중요했다.

책을 보게 하거나, 단어를 외우게 하면 그 순간 중국어는 언어가 아니라 공부가 되어 버린다.

나는 아이들에게 1년은 공부를 하지 않고 놀게 하려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공부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하길 바랬다. 사실 그것은 언어를 배우는 것이지 언어를 배우는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중국어의 문장 구조와 습관을 리듬으로 익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들으면 어느 정도 다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해도 여전히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나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누리에게 이렇게 듣기만 하게 했다.

큰 아들 벼리에게 듣는 과정은 이미 불필요했기에 벼리는 따로 다음 단계로 들어갔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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