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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성규 Nov 02. 2018

1. 돈이 없어 한국을 떠나다.

아이들과 함께 걷는 세상 1

10여년 전,

신문과 TV의 뉴스에는 한국계 이민 1.5세대 학생이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기 난사를 한 사건을 연일 보도 하고 있었다.

총기 사건은 아니지만, 비슷한 한국계 유학생의 이야기는 또 있었다.

두 개의 미국 명문 대학에서 동시 합겹 통보를 받았다는 천재 소녀의 이야기가 사실은 부모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 저지른 자작극이었다는 소식도 있었다.


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국 이민세대의 아픔이라든가, 주변의 과도한 기대와 본인이 가진 성취욕에 비해 무능력한 사람이 겪는 리플리 증후군의 단면이라 전문가들은 말했고, 자식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기대가 만들어낸 슬픈 결과라고 기자들은 평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다. 이것을 남보다 더 뛰어나고 특출한 삶을 살기 바라는 부모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그 자녀들이 처해있는 현실이 너무 잔혹하다는 것에 그 원인이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그러한 것을 부추기는 사회적 환경이었다.

사실, 부모들도 마냥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극장에서 한 사람이 일어서면 뒤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일어서야 하는, 일명 '영화관 효과'에 휘둘려 사교육과 해외 연수를 해야만 하는 부모들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문득 공포가 온몸을 휘어 감아 들었다.

내 아이들은 절대 안 그렇겠지 하는 생각을 누구나가 하고 있지만 정작 누구나의 아이들 중 하나가 바로 내 아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버지니아 공대의 사건이나 명문대 합격의 자작극이 비단 남의 자식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하이로 온지 6개월이 지난 어느 겨울, 어느 건물 난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아들.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두 아들이 떠올랐다.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또는 나의 미래를 위해 나는 두 아이와 아내를 한국에 두고 오랜 시간 중국에 머물고 있었다.

메신저로 간간히 전해 오는 큰 아들 벼리의 울분에 찬 글들은 집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내조차도 이런 아들은 도저히 키울 자신이 없다고 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나와 친구들이 그랬듯이, 모든 한국의 학생들이 똑같이 경험하고 지나치는 성장 과정의 하나라는 생각만 맴돌 뿐 그것이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 애써 모른 척하려 했다.

그렇다고 그저 이렇게 손을 놓고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큰 아들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난 뒤였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기만 하던 큰 아들 벼리는 독기가 가득한 눈빛의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고, 집중력과 인내력의 대명사라고 할 작은 아들 누리조차 심한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 당시 불안한 집안의 상황이 큰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친구를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큰아들 벼리에게 한국에서 보내는 중학교 3년의 시간은 너무나 단조로우며 변화가 없었다.

학교를 마치면 모두 학원을 가기에 함께 놀 친구 조차 없던 작은 아들 누리는 집으로 돌아와 눈치를 보며 티브이 보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똑같이 학원을 보낼 경제적인 여유도 있지 않았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복잡한 증상의 질병일 수록 과감한 처방이 필요한 것 처럼 나의 아이들에게도 적절한 치료 방안이 필요했다.


사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한국의 교육환경이나 사회적 환경이 아니라 국가의 교육기관만 의존하던 나 스스로가 가진 교육 관념이 문제였다.


결론은 20년을 외국에서 생활하며 겪어온 나의 경험과 인맥, 중국어 실력이 아이들의 새로운 교육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물려줄 나의 유산은 돈이 아니라(안타깝게도 돈이 있었으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경험과 지식이었다.

결정을 내리는 데에 많은 계획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계획대로 되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담배 한 가치를 피우는 시간 동안 결론을 내리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너무 무모한 것 아닐까?"

"벼리는 이제 2년만 더 있으면 고등학교 졸업인데 최소한 정규 학업 과정은 마치는 게 좋지 않겠니? 누리도 초등학교는 마치고 가야 '국가'라는 정체성에 혼란이 생기지 않을 텐데."

"애들을 정상적으로 키워야지, 나중에 부모 욕하면 어떡할래?"

이제 막 고등학교를 들어가 1학기를 마친 큰아들 벼리와 초등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친 둘째 아들 누리를 자퇴시키고 중국 상하이로 데려 오기로 결정을 했을 때 지인이나 친척들이 한 말이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보편적 정규 교육, '국가'라는 정체성, 사람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교육 등이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실 내가 대안 교육이나 홈 스쿨링에 대한 거창한 철학적 이상이나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에게 질타 아닌 질타로 이야기할 때, 나는 딱 한마디로 일관했다.

"돈이 없어!"

내가 돈이 없어서 이곳을 떠나는 것이니, 돈을 줄 생각이 아니면 그 입 닫으라는 의미였다. 씁쓸했지만 효과는 있었다. 누구도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았다. 돈이 없으면 보편적 교육이나 정상적인 교육은 힘들다는 비정상적인 현실에 어느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돈이 없다는 나의 말이 그냥 사람들의 성의 없는 충고를 듣기 싫어 만들어낸 말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해외로 데리고 나와 교육을 시킬 만큼의 돈은 없었다. 아니, 아들 둘과 애들 엄마까지, 우리 넷이 밥을 먹고 생활을 하는 것도 벅찰 만큼 돈이 없었다.

결혼생활 20여 년 중, 온 가족이 함께 있었던 시간을 따진다면 딱 절반 10년 정도일까? 그렇게 나는 가족과 떨어져서 상하이와 북경,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홀로 뛰어다녔다.

"무슨 억만금을 벌려고 그렇게 뛰어다니냐?"

서울과 광주, 그리고 춘천을 이틀에 한 번씩 번갈아 다니며 돈을 벌 때, 광주에서 함께 일했던 지인이 했던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뛰어다녀도, 억만금은커녕 몇 백만 원도 통장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었다. 중국어를 중국 사람만큼은 할 수 있었고, 그동안의 산전수전을 통한 경험이 있었으며,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을 하는 보편적 가치관이 있었다.

나는 과연 나의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겨 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돈이라도 많아서 아이들 교육에 투자하면 좋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 세월 동안 내가 보고, 듣고, 느껴온 것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이용해 내 아이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것은 돈이 들지 않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가 상하이로 오기 전, 우리는 부산 서면의 한 카페에 모여 앉았다.

"우리 모두 나름대로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놀자. 한 달이 되던, 1년이 되던, 한국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그냥 놀아보자."

나는 아이들과 애들 엄마를 앉혀 두고 이렇게 말했었다.

"학교는 어떻게 하죠?"

두 아들은 그렇게 학교 가는 것이 싫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학교는 어떡해야 하는지 궁금해했다.

"1년 정도는 학교를 안 간다. 그냥 놀 거야. 1년 동안 학교 안 다니고 놀 자신이 있으면 다 함께 가자."


그해 여름 8월, 아이들과 애들 엄마는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왔다. 나는 어렵게 겨우 유지해 오던 의료서비스 센터를 잠정 폐쇄하기로 했다.

무모하고 대책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두 아들의 외국생활이 시작되었다.

돈이 생기면 부품 하나 하나 따로 구입해서 6개월 만에 겨우 조립한 벼리의 자전거

보통 상하이의 여름은 40도가 넘게 덥지만, 모두가 함께라서 그런지 그해 여름은 그렇게 덥지 않게 느껴졌다. 우리는 마치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상하이에 오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고,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해. 대신 딱 두 가지만 지켜주면 돼. 그게 안되면 상하이로 가는 것은 없던 일로 할 거야."

3년 전 서면 카페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두 가지 다짐을 받아 놓았었다.

"첫 번째, 아침에는 무조건 일찍 일어난다. 너희들이 밤에 몇 시에 자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대신 늦어도 아침 7시에는 무조건 일어나야 돼. 두 번째, 음료수 값은 줄 테니, 매일 2시간 이상은 집에 있지 않고 밖에 나가 있어야 하는 거야. 카페에 가든, 공원을 가든, 혼자만의 시간을 2시간 이상 매일 가져야 한다는 거지. 할 수 있겠어?"

아이들은 이 두 가지의 조건을 흔쾌히 수락했다.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상하이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언덕이 없는 상하이에서 1시간 이하의 거리는 모두 걸어서 돌아다녔다. 1시간이 넘는 곳은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사실 상하이에서 자전거는 필수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레저용으로 타는 자전거가 아니라, 교통수단으로 타야 하는 자전거에 익숙하지 못했었다. 자전거에 관련하여 우리 가족은 적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아마 자전거 이야기만으로도 한참을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상하이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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