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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제작소 Jan 11. 2021

밤이 꿈꾸는 낮, 빛이 꿈꾸는 어둠

곤 사토시 감독의 <파프리카>

본 글은 스포일러와 줄거리, 평가가 없는'3無 영화읽기' 입니다.



꿈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특성을 지닌다. 내가 꾼 꿈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고 있다. 꿈은 논리보다는 비논리에, 이성보다는 비이성에,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영역에 놓인다. 이러한 꿈을 해석하는 다양한 시도가 예로부터 꾸준했었다. 


신화와 구전, 역사적 사실 속에서 꿈을 통한 앞날의 예측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던 시도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꿈을 좀 더 체계적이며 이성적인 영역으로 끌어 올려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으니,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이 그것이었다. 프로이드는 동명의 책에서 무의식의 작동체계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 무의식의 기저를 찾고자 했다. 쉽게 말해 무의식(꿈)이 어떻게 발현되는가를 찾고자 한 것이다. 정신병의 치료 방법을 강구하고자 하는 것으로 ‘정신분석학’의 등장이었다. 


동양에서는 꿈에 대한 인식이 조금 달랐다. 꿈에 대한 이성적이거나 체계적인 접근을 시도하기 보다는 그것을 고유 영역에 두고자 했다. 또한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처럼 꿈과 현실의 경계 자체를 허물어 뜨리기도 한다. 


꿈 속의 꿈을 통해 현실 세계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인셉션>이라면, <파프리카>는 잠식된 무의식(꿈)이 현실에 발현되면서 꿈과 현실의 기반이 무너진 지점을 영화화 했다. 

접근 방식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꿈의 세계를 완전히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그것을 명징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문학과 연극, 미술과 음악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꾸준히 시도되고 있는 작품들을 볼 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에 있어서도 꿈에 대한 다양한 작품들이 있었지만 꿈에 대한 대표적 영화를 꼽으라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보다 몇 년 전 곤 사토시 감독이 꿈의 영역에 대해서 파고들었던 영화가 있었다. 바로 <파프리카>다. 영화 <인셉션>이 2010년 개봉을 했고,  <파프리카>가 2006년 개봉을 했으니 4년이 앞선 셈이다. 


곤 사토시 감독의 <파프리카>를 먼저 접했던 이들에게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을 보면서 많은 비교를 했으리라고 짐작된다. 두 영화는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꿈에 대한 설정에서부터, 타인의 꿈 속으로 잠입하는 내용과 몇몇의 장면은 그대로 옮겨온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이미 상황은 꿈과 현실이 뒤섞여 어느 지점이 꿈이며 어느 지점이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꿈을 꾼다기보다 현실이 꿈에 의해 잠식당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영화 <파프리카>는 꿈과 현실의 이분화된 세계관을 기반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인셉션>은 여기서 더 들어가 꿈의 다양한 층위들을 배열한다. 물론 그 배열된 층위들은 인과관계가 분명하고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파프리카>가 두 개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면 <인셉션>은 최소 2개 이상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꿈 속의 꿈을 통해 현실 세계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인셉션>이라면, <파프리카>는 잠식된 무의식(꿈)이 현실에 발현되면서 꿈과 현실의 기반이 무너진 지점을 영화화 했다. 그렇기에 <파프리카>는 난해한 꿈의 형상화에 치중하고 있으며, 비논리적인 꿈의 시스템을 영화적으로 표현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장면은 곧잘 반복되고, 해결하고자 하는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여기에 대사들 마저 비논리적이니 꿈의 표현에 있어서는 <파프리카>가 훨씬 탁월한 부분을 지닌다. 


<인셉션>은 가장 낮은 층위(가장 깊은 꿈 속의 꿈)에서 순차적으로 깨어남(킥)으로 사건을 단계적으로 해결한다. 흔히 크리스토퍼 놀란을 ‘레이어(층위)’를 사랑하는 감독이라고 칭한다. 그의 레이어는 시간을 기반으로 하는 공간의 나눔이다. 그의 영화 <메멘토>와 <덩케르크> <인터스텔라>와 최근작 <테넷>까지 이러한 형식적인 동일성을 지닌다. 


<인셉션>의 단계적 해결방식에 비해 <파프리카>의 해결 방식은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미 상황은 꿈과 현실이 뒤섞여 어느 지점이 꿈이며 어느 지점이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꿈을 꾼다기보다 현실이 꿈에 의해 잠식당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꿈은 고유의 영역을 벗어나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에 침입한다. 영화의 스크린을 통해서,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 웹사이트를 통해서 현실과 꿈의 경계를 허물며 밀려들기 시작한다. 분명히 우리는 꿈을 꾸었지만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 못하는 것과 같이 분명히 영화를 보았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영화다. 


크리스터퍼 놀란 감독이 꿈의 웅장하고 체계적인 표현을 이루었다면, 곤 사토시 감독은 꿈의 난해함을 난해한 상태로 표현하고자 했다. 마치 꿈에 대한 프로이트적인 접근 방식과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과 같은 방식으로 각각의 영화가 표현되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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