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한때 황야를 어슬렁거리며 숱한 서부의 악인들을 쓰러뜨린 사나이. 그가 출연한 영화는 아니었어도 당대 서부를 피로 물들이든 숱한 위인들이 존재했던 시대. 지금 그 위인들의 한때는 기억하지만 그들이 생존해 살아갔을 뒷모습은 한번도 이야기된 적이 없으며, 누군가의 총에 맞아 최후를 맞았는지, 어느 오두막에서 천수를 누리며 쓸쓸히 죽어갔는지 알지 못한다.
화려했던 한때, 인생의 최절정기에서 소멸해갔던 이들 속에서 굳건하게 살아남은 한 인물의 이야기. 열차와 은행을 털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살인을 저지르던 살인자는 젊고 어여쁜 아내를 맞아 술을 끊고 총을 놓은지 11년이 지났다. 아내가 천연두로 죽은 후에도 캔사스 촌구석에서 어린 아들과 딸을 돌보며 돼지를 키우며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영화적 삶과 영화 밖의 실제적 삶을 세월의 궤적과 함께 쌓고 해체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감독이자 배우는 전무하다. 그의 온전한 인생이 ‘영화적 삶’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라는 장르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그의 전성기(?)를 알고 있다. 과거 그의 행적과 악명을 알고 있으며, 젊은 시절 서부를 내달리며 그의 총구 앞에서 쓰러져갔던 또 다른 악인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1964년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에서 시작된 그의 행적은 이후 1965년 <석양의 무법자>에 이어 1966년 <석양에 돌아오다>의 무법자 3부작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는 살아남은 자, 서부에서 사라져갔던 이들의 뒷이야기이며, 스스로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 함께 무법자 3부작에서 세웠던 서부극의 신화를 해체하는 영화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는 헐리우드의 전성기였으며 서부극의 전성기였다. 당시 서부영화는 선악의 이분법이 분명한 정의로운 영웅과 전형적인 악인의 대립을 주된 테마로 삼았다. 선악의 대결이 얼마나 멋있고 치열한가, 살인의 명분을 악인의 악행으로 얼마나 쌓아 올리는가가 주된 내용이었다. 동일 주제로 다양한 변주와 유사품들이 헐리우드의 공장에서 숱하게 양산되던 시기다.
1960년대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유사한 장르의 서부극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시절 최절정기에 이탈이아에서 만들어졌던 일련의 서부극을 지칭하는 스파게티 웨스턴의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가 있었고, 그의 영화 속 주인공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있었다.
석양을 등지고 황혼에 돌아온 사나이
스파게티 웨스턴은 정통 서부극과 결이 달랐다. 선악의 이분법이 흐려지면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선인과 악인의 명확한 지점에 있지 않았다. 정의를 위해 총을 뽑던 인물들은 돈을 위해 총을 뽑고, 정체성에 있어서도 선인과 악인의 경계지점을 오가고 있었다. 정통 서부극이 대결에 있어서 일련의 신사적(?)인 룰을 가지고 있었던데 반해 스파게티 웨스턴은 일대일의 결투에서부터 일대 다수의 결투까지 상상할 수 있는 대결의 다양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곳에서 살아 남은 자. 무법의 세계에서 촌구석의 농부로 돌아 온 자. 이곳에서 나이를 먹은 무법자 윌리엄 머니(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무법자 3부작의 신화를 스스로 해체하고 재해석한다. 그것은 부정과 연민이 아닌 한 시대의 종말을 향해가고 있으며, 영화 속 인물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현실 속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삶의 변화과정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가 황야에서 보냈던 과거를 마무리하는 중년의 고별사가 되었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2008년작인 <그랜 토리노>는 1970년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했던 영화 <더티 해리> 5부작의 황혼에 들어선 마무리처럼 보인다. 형사물인 <더티 해리>는 미국이 지니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서스펜스 영화다. 이 영화에 출연했던 인물이 고스란히 나이를 먹고 황혼기에 접어 들었을 때, 그의 일상의 문제와 직면했을 때의 내용을 그리고 있다.
자동차 공장에서 은퇴하고 무료한 일생을 보내는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한국전 참전의 기억으로 괴로워한다. 이런 남편의 참회를 바라던 아내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버틴다. 그의 차고 속에 고이 모셔두기만 했던 자신의 1972년산 자동차 그랜 토리노와 이웃집 몽족과의 예기치 않은 얽힘으로 전개된다.
한국전 참전에서부터 미국의 현대사를 관통해 온 ‘월트 코왈스키’는 그가 직접 조립한 포드사의 그랜 토리노와 함께 전형적인 미국인을 상징한다. 이웃의 몽족은 다양한 인종이 어울려 있는 현대 미국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가장 미국적이며 보수주의자인 그의 실제 모습을 투영하며 그의 영화 속 인물이었던 <더티 해리>와 또 다른 작별을 고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서부시대를 살았던 사나이의 중년에 들어선 고별을 목격했다면, 70년대 미국의 정의를 위해 총을 들었던 사나이의 황혼에 들어선 고별을 영화 <그랜 토리노>에서 목격할 수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실제 살아왔던 영화 속 인물들이 늙어가는 모습으로 다시 등장해 영화와 실제 삶을 오가며 그의 과거를 영화 속에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두 편의 영화는 ‘클린스 이스트우드'가 영화 속에서 쌓아왔던 삶과 영화 바깥에서 살아왔던 삶의 기록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전개시키고 있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 그 이후 그가 직접 연출하고 출연한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같이 나이를 먹고 있었고, 그 모습 그대로 영화 속으로 이어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적 역사와 개인적 역사가 함께 녹아 들어가 있다.
2008년 <그랜 토리노>에서 이 일련의 작업은 종결되었다고 생각했다. 영화 배우이며 영화 감독으로, 영화 속 삶과 영화 바깥의 삶을 함께 녹여내며 마무리했던 최종 결과물이 영화 <그랜 토리노>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 몇 편의 영화들을 더 연출했지만 배우로 출연하지 않았다.
‘마지막’ 선택지를 들고 돌아 온 거장
2018년 90세의 영화감독이자 배우가 87세의 마약 운반원의 실화를 다룬 영화 <라스트 미션>의 감독이자 주연 배우로 다시 돌아 온다. 영화 바깥의 삶을 영화 속으로 다시 끌어들여 자신의 실제 나이와 비슷한 이를 등장시켜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원예사업을 하는 ‘얼’은 자기 분야에서 유명인이며 잘 나가는 사업가이다. 바깥으로 맴돌며 가족을 돌보지 못한 남자.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 사업은 망한다. 늦게나마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지만 그곳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 그리고 다시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물건을 운반해주면 돈을 준다는 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물건은 마약이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2008년의 황혼에 접어들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10년이 지난 모습이 등장한다. 황혼을 지나 노쇠한 그의 모습이 그대로 등장한다. 구부정한 어깨, 활처럼 휘어버린 등, 더욱 깊게 패인 얼굴의 주름살이 그대로 느리고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현실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 온 것이다. 세 편의 영화 속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그의 육체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영화 <그랜 토리노>에서 종결되었던 그의 영화 속과 영화 바깥의 삶이 <라스트 미션>에 다시 이어지면서 마무리하고자 했던 그의 영화 안과 밖의 ‘미션’이 아직 남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랜 토리노>의 주인공인 월트 코왈스키가 한국전에 참전한 용사라는 것과 <라스트 미션>의 ‘얼 스톤’ 또한 한국전 참전 용사라는 점과 가족과의 관계는 여전히 서먹하다는 동일한 설정을 가지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다시 영화 ‘안과 밖’을 버무려 돌아 온 이유, ‘마지막 미션’은 무엇일까. 정의로운 죽음, 혹은 사라짐의 선택지를 택했던 그가 또 다른 마무리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 그것은 <라스트 미션>의 마지막 장면인 교도소에서 평안히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을 통해 이것이 또 다른 ‘마지막’ 선택지라고 그의 귀환을 알리는듯 하다. 90세의 노장. 죽음과 사라짐, 평안의 공간을 보여주었던 결말들에서 이제 더 이상 그의 영화 ‘안과 밖’을 함께하는 귀환(영화)은 없을 것 같다. 물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기대에 가득 찬 영화관람을 할 것이다.
영화적 삶과 영화 밖의 실제적 삶을 세월의 궤적과 함께 쌓고 해체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감독이자 배우는 전무하다. 그의 온전한 인생이 ‘영화적 삶’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라는 장르가 되어 버렸다.
락 그룹 이글스의 대표곡인 <데스페라도(Desperado)>의 가사,
‘무법자여, 오, 당신은 더 이상 젋어지지 않아요 Desperado, oh, you ain't gettin' no younger/…/울타리에서 내려와, 문을 열어요 Come down from your fences, open the gate/만약 비가 올지 모르지만, 당신 위에 무지개가 있어요 It may be rainin', but there's a rainbow above you/누군가 당신을 사랑하게 하는게 더 좋을 거에요 You better let somebody love you/ 더 이상 늦지 않게 Before it's too late ’
의 가사처럼 시작해 조정권 시인의 <독락당(獨樂堂)> ,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벼랑 꼭대기에 있지만/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내려오는 길을 부숴버린 이.
처럼 스스로 올랐던 길을 부숴버린 그 어떠한 경지 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머물고 있다. 하지만 언제 다시 사다리를 내리고 조용히 찾아와 그의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