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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제작소 Feb 10. 2021

그들의 여름밤이 우리 모두의 여름밤이 되는 시간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

그들의 여름밤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나의 여름밤에 가닿는다. 그들 각자의 어느 시절 여름밤이 우리 모두의 어느 한 때 여름밤으로 연결된다. 그해 여름, 더웠다는 것만을 빼고 특별한 일이 없었던 여름밤이 되살아나 화면 속에 펼쳐진다. 그것은 오래된 앨범을 펼쳤을 때, 잊고 있었던 추억과 이야기들이 되살아 오듯 세월의 먼지를 안고 다가온다. 


윤단비 감독의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가족앨범을 펼쳤을 때의 그 느낌으로 진행된다. 예전 살던 집을 배경으로, 막내가 태어나 한창 걸음마를 뗄 때의 모습으로, 꽃다발을 안고 있는 누나의 졸업식에서, 아버지의 생일날 모두가 모여 앉은 식탁 위에서.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들 속에서, 그 시절 그때 각자의 표정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나름의 고민을 살포시 들춘다. 


대사와 설명 이전에,  언어로 전달하기 이전에 전달되는 그 무엇인가로 <남매의 여름밤>은 전달된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몸짓만 봐도 알’ 수 있는, 펼쳐지는 화면만으로 먼저 전달되는 공통적인 정서와 추억 속으로 데려다 놓는다. 

얼마 되지 않은 세간을 승합차에 싣고 더부살이를 하러 할아버지의 오래된 이층집으로 옮겨 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소녀(옥주)와 소년(동주), 아버지와 혼자 살고 계신 할아버지 3대의 결합 속에 어머니가 부재한다. 이혼한 아버지와 상처한 할아버지 모두 아내의 존재가 없다. 그리고 몸이 좋지 않은 할아버지의 염려를 핑계로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은 고모가 이곳 이층집으로 피신 하듯 들어 온다. 고모 역시 누군가의 아내이지만 자식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니다. 


이러한 설정 속에서 펼쳐질 수난과 갈등, 화해의 과정을 짐작하지만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갈등이 존재하지만 그 갈등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아버지의 생활고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깊은 고난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는다. 사춘기 옥주의 고민과 사건이 존재하지만 극적인 상황으로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우리들 모두의 기억 속에 하나씩 간직하고 있었을 그 여름날의 정서를 끄집어 낸다. 

영화 속 풍경 모든 것이 우리의 기억을 일깨우고, 세월의 때를 묻히고 묵묵히 자리잡고 있는 모든 소품들이 우리의 그때 그 모습이었다.

사는 집과 가족 환경, 자라온 배경이 다를지라도 어느 한때 여름의 가족들이 지나 왔을 그 지점의 희노애락을 포착하여, 낡은 앨범을 들추듯 회상의 분위기로 이끈다. 여기에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품들도 한몫을 한다. 할아버지와 함께 세월을 이고 있는 것들. 오래된 선풍기와 괘종시계, 그 시절 필수 혼수품이었을 전축과 재봉틀, 넓지 않은 마당을 정성스레 가꾼 텃밭, 할아버지의 집은 그 세대가 보편적으로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을 살림들이 그때 그 자리에 차분히 자리잡는다.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각자의 고민과 사연이 있듯이, 할아버지의 이층집과 살림살이들이 모두 보편적인 추억을 가지고 있으며, 오래된 소품들이 ‘우리의 여름밤’에 대한 추억을 되살려주고 있다. 그래서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우리의 여름밤’이기도 하다. 


사건과 갈등, 고민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깊고 어두운 골짜기로 향하지 않는 것. 영화 속 등장인물은 한때 우리 가족들 누군가의 모습으로 투영되어 구구절절하지 않지만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는 것. 우리에겐 없지만 그때 누군가에겐 있었을지 모르는, 혹은 우리도 하나쯤 가지고 있었을 살림살이의 모습.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등장인물과 풍경과 소품들이 모두 어울려 우리 모두의 어느 여름밤으로 조용히 내려 앉는다. 


영화는 큰 갈등없이 물흐르듯 흐른다. 그 시절 그때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지도 모를 이야기 속에서 한 여름밤 모기향 피어 오르듯 기억들이 피어 오른다. 영화 속 풍경 모든 것이 우리의 기억을 일깨우고, 세월의 때를 묻히고 묵묵히 자리잡고 있는 모든 소품들이 우리의 그때 그 모습이었다. 

할아버지의 이층 양옥집을 포함해 그 집에 가득 들어찬 모든 물건들이 추억을 소환하는 영화. 자잘한 갈등 속에 차분히 유년의 기억으로 가닿는 영화다. 

대사와 설명 이전에,  언어로 전달하기 이전에 전달되는 그 무엇인가로 <남매의 여름밤>은 전달된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몸짓만 봐도 알’ 수 있는, 펼쳐지는 화면만으로 먼저 전달되는 공통적인 정서와 추억 속으로 데려다 놓는다. 


영화의 시작과 늦은 밤 할아버지가 혼자서 전축을 듣는 장면과 엔딩에 신중현 작곡의 '미련'이 흐른다. 그 노래의 가사,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처럼 그 시절의 가족들과 그 속에서 일렁였던 갈등과 묵묵히 지켜봐왔을 우리집과 물건들이 "갈 수 없는 먼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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