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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도제작소 Feb 18. 2021

외롭고 높고 쓸쓸한 강호(江湖)에서

'상실'을 이야기하는 두 편의 무협영화

무협 영화의 ‘수직과 수평’, 그리고 ‘강호(江湖)’


액션 영화의 기대치는 ‘강도(強度)’에 있다. 총이든, 칼이든 맨손이든 도구의 차이가 있을뿐 형식은 그것의 수직과 수평의 조화에 있다. 박진감 있고, 멋지고, 화려하고, 호쾌하고, 아름답다는 표현의 기저에 바로 ‘강도(強度)’가 있다. 그리고 그 ‘강도(強度)’에 술(術)과 도(道)와 예(藝)의 의미를 부여하여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고 있는 액션 영화의 장르가 있으니 친숙하고 좋아하는 무협 영화다. 
   

무협의 장소는 또 얼마나 매력적인가. 달빛 고요하고 갈대숲 바람에 살랑이는 나루터이거나, 번잡한 저잣거리이거나, 말을 묶어두고 협객들이 목을 축이는 주점이거나, 대륙의 깊은 곳 모랫바람 휘날리는 사막의 초입이거나. 무협 영화는 이 모든 장소를 묶어 ‘강호(江湖)’라 지칭한다. ‘강호’라는 말뜻의 유래는 다양하지만 그 단어가 주는 울림과 분위기는 수많은 무협 영화를 섭렵하며 자연스럽게 알고 있거나 알 것 같다. 

  

무협 영화의 협객들은 이 강호를 들고 남을 반복하며 강도의 수직과 수평을 반복한다. 강호에 들어갈 때의 명분(보통 이 명분은 역사적 사명이나 복수를 목적으로 한다)과 강호를 떠날 때의 구실을 통해 강도(強度)만 있던 무협의 세계에 철학과 함께 인간으로서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그려 넣는다. 

‘강호’라는 말뜻의 유래는 다양하지만 그 단어가 주는 울림과 분위기는 수많은 무협 영화를 섭렵하며 자연스럽게 알고 있거나 알 것 같다.
  ‘도도한 파도는 해안에 물결을 만들고/물결따라 떴다 잠기며 아침을 맞네/푸른 하늘을 보고 웃으며 어지러운 세상사 모두 잊는다/이긴 자는 누구며 진자는 누구인지 새벽 하늘은 알까’


리듬만 들어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무협 영화의 유명한 노래 ‘창해일성소(滄海一聲笑, 푸른 파도에 한바탕 웃는다)’의 가사일부다. 모든 미련을 버리고, 피가 낭자하고 목숨이 오고갔던 강호를 물러나는 이의 인생무상의 정서가 가득하다. 



  ‘의연하게 서서 일만근의 파도를 바라본다/열혈은 태양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니/담력은 단련된 무쇠와 같고, 뼈는 정련한 강철과 같다/가슴에 거대한 포부, 눈빛은 끝없이 멀리/온 마음으로 사나이가 될 것을 내게 맹세한다’


영화 <황비홍>의 유명한 노래 ‘남아당자강(男兒當自強, 남자는 마땅히 자기 스스로 강건해야 한다)’의 가사 일부다. 그 내용에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강호에 들어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각오가 대단하다. 무협 영화의 가장 유명한 두 노래 역시 강호의 들고 남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무협 영화는 이처럼 강호(江湖)와 강도(強度)를 기반으로 한 구조적인 형태의 장르다. 이 구조 속에서 액션은 공중을 날아다니고 장풍이 오고가며, 칼바람에 거목이 쓰러지고, 휘어진 대나무 위에 가볍게 내려 앉아 몸짓 한 번으로 무수한 적들을 쓰러 뜨린다. 


무협 영화의 형식을 빌어 상실과 고독을 이야기하는 <일대종사>


왕가위 감독의 영화 <일대종사>가 시작되면 주인공 엽문(양조위)이 말한다. “쿵푸는 두 단어로 말할 수 있다. 수평과 수직! 지는 자는 수평이 된다. 최후에 수직으로 서 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거리에서 적들은 수직으로 다가와 수평으로 무너지고 그 적들과 함께 주변의 기물들은 함께 수평으로 밀려나 부서진다. 수직으로 내리긋는 비 속에서 최후까지 수직으로 남는 자가 바로 엽문이다. 이 대사는 다시 영화의 결말에서 반복된다. 

  

무협 영화의 형식을 빌어왔지만 <일대종사>는 기존의 무협영화와는 다르다. 이 속엔 액션의 강도(強度)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며, 강호(江湖)의 들고 남 보다는 일제침략이라는 역사적 사실 속에 머무르며, 맞닿을 수 없는 인연과 높고 높은 경지에서 느끼는 인간적인 외로움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조위가 연기한 영춘권의 일대종사 엽문이 실존인물인 반면, 팔괘장의 유일한 후계자로 남아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장쯔이가 연기한 궁이는 허구의 인물이다. “무술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을 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천지, 마지막으로 중생을 보는 것”은 팔괘장의 제창자 궁이 아버지 궁보삼의 대사다. 남방 무술의 영춘권과 북방 무술의 팔괘장, 남자와 여자의 차이만큼 무술을 대하는 두 사람의 세계관은 출발이 다르다. 

  

팔괘장의 수제자이며 궁이와는 남매와 같은 마삼(장진)이 궁이의 아버지를 해친다. 하지만 아버지의 벗과 친척들은 모두 복수를 말린다. 이는 궁이 아버지의 대사 속에 녹아 있는 무술을 대하는 태도와 통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궁이는 복수를 결심하면서 수평과 수직의 세계, 이기고 지는 엽문의 대사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 내내 흐르는 독백처럼 <일대종사>는 왕가위적인 색채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영화다.

이에 반해 엽문은 수직과 수평의 세계에서 무술의 또 다른 세계로 한발짝 들어간다. 영화에서 엽문은 팔괘장, 형의권, 홍가권 고수에게 한 수씩 지도를 받는다. 이 지도는 무술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각 문파별로 계승되어 온 무술의 고유한 세계관을 읽는 과정이다. 이 세계관은 각 무술의 품새가 보여주는 동작의 의미를 통해 삶의 철학을 두고 겨루는 대결이기도 하다. 이 중 가장 백미는 엽문과 궁이가 ‘전병’을 맞잡고 겨루는 대결로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느리면서도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하다. 대결의 와중에 궁이는 영춘권의 자세를, 엽문은 거기에 호응해 팔괘장의 자세를 취한다. 어찌보면 춤을 추는 것처럼, 두 연인의 희롱과도 같은 느낌으로 표현되었다. 

  

무협 영화의 형식을 빌어왔지만 <일대종사>는 기존의 무협영화와는 다르다. 이 속엔 액션의 강도(強度)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며, 강호(江湖)의 들고 남 보다는 일제침략이라는 역사적 사실 속에 머무르며, 맞닿을 수 없는 인연과 높고 높은 경지에서 느끼는 인간적인 외로움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흐르는 독백처럼 <일대종사>는 왕가위적인 색채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영화다. 


아름다운 풍경에 담긴 ‘인간’ <자객 섭은낭>


수직과 수평, 강도(強度)의 무협영화에서 이 모든 것을 말끔히 지워낸 한 편의 무협영화가 있으니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자객 섭은낭>이다. 액션은 아예 없다고 할 정도로 짧고 간단하다. 살인의 이유, 죽이는 자와 죽는 자의 관계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없다. 여기에 영화 초반 흑백으로 섭은낭의 과거를 보여주는 장면을 제외하고 자객은 아예 살인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조차 의문스러울 정도다. 

  

영화의 무대는 당나라다. 당나라는 수차례에 걸쳐 변방의 위박을 속국으로 삼으려 했지만 만만찮은 저항에 부딪히게 되고 마침내 독립국의 지위를 인정한다. 그리고 위박의 절도사 전계안과 그 집안의 관계를 둘러 싼 암살과 복잡다단한 얽힘이 이야기를 끌어 가고 있다. 

  

‘이유없음’이다. 정치적 음모나 복수, 강호의 도리는 없다. 주인공 섭은낭의 표정에서조차 읽히지 않는 까닭모를 ‘멈춤’에 가깝다.

어려서 집을 떠난 섭은낭은 스승에 의해 암살자로 키워진다. 어느 날, 위박 지역의 절도사이자 정혼관계였던 전계안을 암살하라는 명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 온다. 하지만 옛 정 때문에 암살을 포기하고 스승과 부모에게 작별을 하고 신라로 떠난다는 게 이야기의 전부다. 간단한 줄거리에 복잡다단한 얽힘이라고 표현했던 이유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를 쉽게 파악할 수 없고, 감독 또한 이러한 관계를 설명할 별다른 장치들을 마련해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기고 지는 수직과 수평의 구도가 제외되어 있다. “너는 검술은 완벽하게 익혔으나 마음이 모질지 못하다”라고 말하는 섭은낭의 스승 가신공주의 말 속에 자객으로써 갖추어야할 필수적인 자격요건중 하나인 ‘마음’이 자객답지 못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섭은낭이 암살을 포기하고 물러났을 때나, 두려움과 도덕적 갈등을 표정에 담거나 스스로를 질책하지 않는다. 늘 그렇듯 조용히 듣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듯이 다가왔다가 사라질 뿐이다. 

  

‘이유없음’이다. 정치적 음모나 복수, 강호의 도리는 없다. 주인공 섭은낭의 표정에서조차 읽히지 않는 까닭모를 ‘멈춤’에 가깝다. ‘망설임’으로 읽힐지도 모르지만 섭은낭의 실력과 주저없는 물러남으로 봤을 때 ‘멈춤’이라고 표현하는게 적절하다. 

  

섭은낭(聶隱娘)의 ‘섭’은 귀 이(耳)자 세 개가 모인 글자로 ‘소근거리다’는 뜻이다. 잘 듣는다는 의미다. 은(隱)은 ‘숨는다’는 뜻이다. 이름처럼 섭은낭은 잘 듣고 은둔하는 여인이라는 의미다. 영화의 모든 상황에서 섭은낭이 화면에 등장하지 않더라도 기등과 나무 위, 커튼 뒤 어느 곳에선가는 모든 상황을 듣고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존재다. 딱 이만큼이 영화 <자객 섭은낭>의 ‘강도(強度)’다. 현란한 칼놀림이나, 중력 법칙을 무시하고 공간을 자유롭게 지배하는 무협이 아닌, 잠시 칼을 맞대고 물러나는 정도의 ‘강도(強度)’. 장검이 아니라 단검을 들고 다가갈 수 있는 만큼의 거리, 잠시 장검의 길이를 벗어나 단검의 길이로 다가섰다가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정도의 간단한 강도(強度)다. 

  

무협 영화의 장르를 빌어왔으나, 수직과 수평, 강도(強度)가 다른 영화로 봐야할 것이다. 무협영화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것들이 말끔히 제거되어 버린 영화로써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 영화에서 무엇인가 쉽게 알 수 없다는 당혹감과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가 무협 영화의 장르를 빌어 전작들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상실’과 ‘고독’의 깊이를 말하고자 했듯이, 허우 샤오시엔 또한 <자객 섭은낭>에서 그가 끊임없이 밀고 왔던 영화의 중심이 그 속에 있음을 말한다. 2016년 영화 개봉에 맞춰 내한한 허우 샤오시엔은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중심과 그의 전작들의 중심은 모두 ‘인간’이며 ‘사람의 감정,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담아내는 데 있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무협 영화에서 우리가 기대했던 것들을 발라내버리고, 허우 샤오시엔의 ‘중심(인간)’을 읽으려할 때,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과 그 풍경 속에 흐르는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등이 ‘인간’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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