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보는 눈에 대하여
겨울, 눈, 일본 이런 것들을 떠올리면 나와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은 아무래도 눈밭에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던 러브레터나, Merry Christmas Mr.Lorrence(by 류이치 사카모토)가 배경음악으로 흐르던 철도원같은 영화를 떠올릴 테지만, 그 이전에 일본의 겨울은 아마 이 소설이 대표하고 있었을 겁니다. 이 소설은 겨울, 먹고살 걱정없는 중년의 남성이 나이어린 게이샤에 마음이 끌려 눈이 많이 오는 일본의 한 북쪽의 외딴 고장에 찾아와 지내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보면 설정 자체는 별로 아름답지가 않죠. 그러나 저는 이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저는 이 소설을 심미안에 대한 글이라고 결론을 내렸고요. 천천히 읽어봅시다.
이 소설은 첫문장이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현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위의 문장을 읽으면서, 저는 어둔 터널에서 빠져나왔을 때 눈이 많이 내려 하얗게 덮인 시골마을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소설은 이 아름다운 문장처럼 묘사적으로 진행됩니다.
사실 이 장면은 주인공 시마무라가 게이샤 고마코가 살고 있는 마을에 기차를 타고 도착하는 장면입니다. 역으로 오는 기차에서 시마무라는 어떤 남자를 간호하고 있는 처녀를 보게되는데, 차창에 비친 그녀를 주인공이 관찰하는 장면묘사가 또 예술입니다. 기차를 타고 지나가는 관계로 창 밖으로는 조용히 밤 풍경이 흐르고 있고, 창 위로 처녀의 모습이 겹쳐지는데, 밤이니까 창 밖의 등불이 깜빡 하고 처녀의 얼굴에 겹쳐져서 비춰질 때의 묘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에 산야의 등불이 켜졌을 때엔, 시마무라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슴이 설렐 지경이었다." 시마무라도 가슴이 설렐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차를 타고 유리창을 바라볼 때마다 이 장면을 떠올리곤 합니다. 몰래 마음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와중에 그 사람이 너무 아름다울 때의 그 순간의 표현이 너무 아름다워서 글을 읽던 저도 가슴이 설렐 지경이었습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만나러 왔는데 첫 장면부터 다른 처녀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이 중년남성이 두 여인에게 모두 마음이 이끌리게 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주인공 남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에 대하여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는데 그건 바로 허무한 시선의 관찰자입니다. 이런 남자를 고마코는 사랑하고요.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남성을 고마코는 열심히도 사랑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소설은 시마무라의 시선을 따라서 흘러가기 때문에 이 여인의 사랑이 애처롭게도 공허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이러한 마음은 "시마무라에게는 허망한 헛수고라고 생각되고 머나먼 동경이라고 애처롭게 여겨지는 고마코의 생활 태도가 그녀 자신으로서는 가치를 지닌 채 어엿하게 발목 소리에 차고 맑게 넘쳐흐르는 것이리라."라는 문장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소설 속에서 가장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는 고마코인데, 이 여성이야 말로 사랑을 아는 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여성은 자신의 삶을 사랑할 줄도,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녀의 소박한 생활 태도, 정결한 몸가짐, 글을 읽고 구절을 정리해오던 모습, 술을 한잔 걸치고 시마무라 상에게 가서 한 말들..
한편, 고마코의 사랑을 받고있는 시마무라는 삶을 공허하게 바라보는 중년남성으로서 고마코에게 마음을 이끌리면서도 요코라는 처녀를 바라보면서 계속 아름답다고 감탄을 해대는데, 남자놈들은 어쩔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사람의 시선이 상당히 탐미적이고 심미안이 있어 여자들이 매력을 느낄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버렸습니다. 사실 이 소설은 썸을 탄다면 이들처럼이라는 부제를 붙여주고 싶을 정도로 남녀사이에서 볼 수 있는 관능적인 시선과 관계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마무라의 심미안은 이들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납니다. 이 소설에 의하면 심지어 죽어가는 나방조차도 아름답습니다. "그방에 마치 붙여둔 것처럼 역시 나방 한 마리가 가만히 붙어 있었다. 적갈색의 작은 깃털처럼 생긴 촉각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나 날개는 투명한 연둣빛이었다. 여자의 손가락 길이만한 날개였다. 그 저쪽 건너편에 줄지어 있는 접경의 산들은 석앙을 받아 벌써 가을빛으로 물들어 있어서, 이 한 점의 연둣빛은 도리어 죽음처럼 보였다. 앞날개와 뒷날개가 겹쳐져 있는 부분만은 짙은 초록빛이었다. 가을 바람이 불면 그 날개는 열은 종잇조각처럼 팔락팔락 한들거렸다." 사실 무언가를 이렇게 멋지게 표현하려면 심미안이 필요하지요.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는거니까. 마치 필터로 보정된 사진과 같이,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다른 것을 빼고 분위기만을 감지할 수 있는 자체적인 필터가 필요한 겁니다. 시마무라의 시선을 따라서 보이는 이 소설 속 세계는 나너 할것 없이, 주변 경치마저도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아 그래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런 곳이었지 하고 새삼 감탄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아 사람이고, 관계고, 세상이고 간에 온통 아름답구나 하고 생각해버렸습니다. 그 아름다움이 온통 멕아리는 없지만요....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읽어보려고 네이버에서 소설 설국을 검색해보니 어떤 남성이 블로그에, 역시 인기가 많으려면 유산을 상속받고, 세상사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잘 대해달라는 여자에게 아아 난 해줄수있는게 아무것도 없어라고 말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고 적어두었더군요. 이건 마치 영화 색계를 보고나서 여자는 역시 다이아몬드지 하고 결론을 내렸다는 어떤 남성의 그것과 비슷하였습니다. 인기에는 어쨌든 다 이유가 있는 법인데, 누군지도 모르지만 결론이 그거라면 당신들은 안될거야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수 없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추운 분들이여, 로맨스가 그립다면 이 책을 추천합니다. 소설가 김연수씨가 첫사랑같은 소설이라고 표현한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