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외 5권
11월에도 이런저런 책을 읽었다. 건축, 사회, 에세이, 소설, 이번에는 꽤 밸런스 좋게 읽은 거 같은데. 목적이 있는 책도 있었고 목적 없이 우연히 읽었다 감명을 받은 책도 있었다. 오늘은 앞 이야기보다는 책 이야기를 더 써보려고 한다.
1. 금각사 - 웅진지식하우스
금각사 방화 사건을 스토리로 담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이다. 국내에 정발 된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금각사』는 가장 좋은 평을 받는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탐미주의적인 문장의 연속과 순수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주인공, 그들의 발상과 행동이 범상치 않아 온전히 동화될 수는 없지만 탐미주의적인 생각과 사상은 독자의 머리에 깊게 파고든다.
내적인 아름다움과 외적인 아름다움, 인식의 세계에 대한 미시마 유키오의 이야기는 '탐미주의 소설이란 사실 아름다운 문장의 나열 수준이 아닌가? 소설 그 자체의 가치는 미비한 것이 아닌가?'라는 혹평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견고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명과 암, 인식과 현실, 주인공과 대비되는 인물들을 배치함으로 독자는 주인공의 세계가 흔들리고 있음을 점차 느껴가며 거대한 이야기의 흐름에 함께 휩쓸린다.
다음에 읽으려고 미리 준비해 둔 책은 『달리는 말』이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방문했을 때 샀던 책인데 아직 비닐도 뜯지 않은 채 책장에 보관 중이다. 언제 읽을까 마음먹지는 않았지만 이 여운이 끝나기 전에 비닐에서 꺼내 읽어보려고 한다. 나는 아름다운 문장을 좋아한다. 내 손으로 아름다운 문장을 빚어내지는 못하지만 아름다운 문장을 좋아한다. 이건 원숭이가 새를 동경하는 마음과 같을까.
2. 연필로 쓰기 - 문학동네
연필 하면 떠오르는 한국의 작가, 김훈의 에세이집이다. 북 리더기를 사고 난 후에 바로 리더기의 성능을 볼 겸 샀던 전자책이었는데 당시에는 쓱쓱, 생각보다 대충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직근무 중에 챙겨가 읽어서 그런가.
많은 이들은 김훈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칼의 노래』를 떠올리리라 생각한다. 사실 그를 지금의 위치에 세워준 작품은 다름 아닌 『칼의 노래』였으니까. 그 이전에는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은 에세이스트였는데 단 하나의 작품으로 작가가 되었다고 하니 이런 이야기를 적고 있는 와중에도 책장에 꽂혀 있는 강렬한 붉은 표지의 책이 내게 자신의 위엄을 뽐내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름을 들으면 다른 무엇보다 노란 스테들러 연필을 먼저 떠올린다. 그는 언제나 노란 스테들러 연필을 고집했다고 한다. 연필을 깎고, 원고지에 한참을 쓰다가 몽당연필이 되면 모아두고, 다시 새로운 연필로 글을 이어갔다는 그의 이야기는 고집스러운 장인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연필과 원고지에는 요즘 시대에는 없는 멋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각사각, 자신을 깎아내며 문장을 만드는 연필의 소리와 종이 위에서 얕은 마찰음을 내며 춤추는 나의 손. 컴퓨터와 비교하면 고되지만 그럼에도 손으로 만든 문장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한 번 써 내려간 글은 다시 고치는데 또 노력이 들기에 고민하며 이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손으로 만든 문장에는 생각의 무게가 더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나는 일주일에 연필을 한 번 잡을까, 말까,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 핸드폰도 없던 병사 시절에는 강제로 그를 따라 연필로 글을 쓰기도 했지만, 그 기억도 벌써 햇수로만 10년 전의 기억이다. 당시의 나는 어떻게 글을 써왔나. 생각해 보면 글을 쓰는 손이 너무 느려 다음 문장을 한참 고민하며 썼던 거 같다. 당시 내가 썼던 글에는 생각의 무게가 더해져 있었구나.
3. 자연스러운 건축 - 안그라픽스
구마 겐고의 건축 철학서. 사실 취향 많이 갈리는 책이다.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집이라는 공간을 생산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무슨 이런 철학이 필요하냐 생각할 수도 있고, 집이라는 공간에 상상력을 펼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건축 철학에 공감하며 웃을지도 모른다. 혹은 말만 이렇게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맨날 비싼 재료로 비싼 집이나 짓는 놈이라고 욕할 수도 있고.
구마 겐고는 건축사들에게 딱 그 정도 위치다. 자연주의 건축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비싼 건물이나 짓는 놈이라는 평가도 받는 인물이고, 일본 버블 경제 시기를 지나 현대까지, 많은 시간을 건축사로 보내면서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세워나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인물이다. 나는 그 두 가지 평가가 모두 공존한다고 생각하고 또 공존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의 건축 철학을 보면 어쨌든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세워둔 기준과 사회의 시선을 비교하며 건물을 설계하는 사람인 거고, 그런 사회의 시선에 대한 기민한 반응이 그를 일본의 명 건축사로 자리 잡게 하지 않았나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는 건축사로서도 사람 구마 겐고로서도 배울만한 점이 충분히 있는 인물이고, 이 책은 그의 단면을 보여주는 책이다. 혹시 건축사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그렇다면 이 책을 권해주겠다.
4. 1995년 서울, 삼풍 - 동아시아
의도치 않게 건축사의 이야기를 읽은 후에 바로 읽게 된 건축과 관련된 재난에 대한 책이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듣고 본 것이 있기에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저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내 친형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그래서 당시 TV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왔는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모두 알지 못한다. 단지 우리 가족이 수도권 어딘가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당연한 이야기지만 백화점에는 많은 이들이 왕래한다. 백화점을 자기 집처럼 자주 드나들던 사람들부터 살면서 백화점에 가본 적도 없는데 우연히 그날 들렀던 사람들까지. 이 책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담겨있다. 그런 이들의 모든 목소리가. 책을 읽으면서 가족들을 떠올렸다. 이런 건축 사고는 언제 어디에서 발생할지 알 수 없다. 재료를 누락하거나 혹은 안전하지 못하게 건축을 했다는 이야기가 작년 이맘때쯤 갑작스럽게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했었는데 부디 건축물에 문제가 생기는 일도, 그리고 이런 대형 참사도 다시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5. 책과 열쇠의 계절 - 엘릭시르
지난달에 이어 이번 달에도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을 읽었다. 이 책은 소시민 시리즈, 고전부 시리즈처럼 학교 생활에 추리라는 소스가 끼얹어진 물건이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장편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보통 인물이 어떤 식으로 배치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탐정(안락의자 스타일인지 발로 뛰는 스타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과 조수, 마치 셜록 홈즈가 연상되는 조합이다. 그렇기에 이번 작품도 이야기를 풀어내는 인물이 조수격, 그리고 특이하다고 설명되는 친구가 탐정 역할을 맡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그간 보여준 작품들과는 달리 두 명의 탐정이 존재하고 한 명은 타인을 믿지 않는, 한 명은 타인을 믿는 타입으로 갈려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식의 전개를 보여줬다.
물론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하기에 추리 전개가 굉장히 중요한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처음 말한 것처럼 추리라는 소스가 끼얹어진 물건이라 사실 추리 파트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과 주위 사람들간의 관계도다. 새로운 학기 시작과 함께 만난 친구, 선배, 후배, 학생이라면 흔하게 만들어질 관계도 속에서 그들은 탐정으로서 역할을 해결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그 관계가 좋은 방향으로 풀려나가지는 않는다. 애초에 학교라는 틀에서 만들어진 관계기에 주위 인물들이 가볍게 쓰고 가볍게 놔도 되는 줄 정도로만 생각하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추리 능력에 전능감을 느끼지 않는다. 한마디로 우쭐거리지도 않고 자신들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 능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도왔지만 결국 그 행동이 감사로 돌아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냥 이런 기묘하고도 이상한 일들을 부딪히고 지나칠 뿐이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이런 덤덤한 반응에서 조금 의아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면 눈 녹듯 사라진다.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추리가 아니고 학생, 친구와의 관계, 각자의 모습이라고. 늘상 풀어내는 전개 방식이지만 질리지 않는 맛이다. 그래서 다음 고전부나 소시민은 언제 한국에 정발되나, 소시민 시리즈 마지막 권은 일본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빨리 정발해라 엘릭시르. 그리고 나중에 찾아보니 이 책도 일본에서는 시리즈로 포함된다는데 다음 도서는 언제 가져올 것이냐, 빨리 정발해라 엘릭시르.
6.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 - 민음사
정말 인기 없는 부류인 독서 에세이 중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던 민음사의 독서 에세이다. 한국 사회에서 독서 에세이는 정말 특이한 장르에 속한다. 많은 저자들이 내지만 많은 독자들은 이 장르 자체를 싫어한다. 애초에 한국 사람들은 남들이 읽은 책에 별로 관심이 없다. 애초에 이런 장르를 정확하게 대체해주는 것들이 SNS 북스타그램이나 개인 서평 블로그고. 그래서 보통 독서 에세이 장르로 책이 나오면 증쇄를 찍어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거기에 다루는 책들도 장르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고전을 다루는 경우가 제일 많고, 젊은 독자-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젊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들과 더불어 직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경우, 혹은 셀럽의 책장을 다루는 경우가 전부다. 그래서 이쪽 장르는 공급에 비해 수요가 적고, 그 수요도 특별한 케이스로만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을 읽은 이유가 애초에 원고 기획서를 적어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내가 썼던 서평들을 책으로 낸다면 어떤 기획이 될까, 기획서를 작성하기 위해 많은 이들에게 읽혔던 책을 가져왔고, 읽으면서 시장 분석을 했을 때 이런 식의 시장 분석이 나왔다. 그리고 원고 기획서를 쓰면서 든 생각, '아, 나는 여러 장르를 다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사회과학적인 이야기를 많이 다루고 있었구나.'
기획서도 결국 사회과학적인 방향으로 작성이 되었다. 그리고 쓴 기획서에 대해서 스스로 자평을 해보자면... 결국 위에서 했던 이야기들과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 내가 쓴 기획서는 다루는 책의 장르가 기존과는 다르다는 특별한 점이 있지만 결국 저자인 내가 셀럽도, 저명한 인물도 아니고 내가 가진 캐릭터성이라고는 젊은 세대, 군에서 오래 일해온 블루컬러 노동자, 사회과학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이정도 뿐인데 이런 캐릭터성으로 성공했던 인물도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한 인물은 그보다 훨씬 많았기에 이런 기획은 역시 힘들구나 생각이 들었다.
요즘 사회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또 선후배들이 군에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그럴까, 뉴스를 볼 때마다 그들의 얼굴이 생각나 나도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면, 지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계속 생각하게 된다.
국회에 707 특임대가 진입할 때 한 친구가 내게 이런 카톡을 보냈다. 국회 영상을 보는데 새파랗게 어린애들밖에 없다고. 당연히 그런 곳에 진입하는 요원들은 하사, 중사, 대위급일 거니까. 그렇게 답하고 거실로 나왔다. 역시 아버지도 거실에서 비상 계엄령 관련 소식을 뉴스로 보고 계셨고, 아버지는 내 얼굴을 보자 가장 먼저 군대에서 나오길 잘했다는 이야기를 꺼내셨다.
"국회에 진입하는 군인을 보는데 네 생각이 나더라."
역시 그들은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구나. 그날 많은 이들이 그들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 혹은 내 아들이자 딸, 그리고 나 같은 이들에게는 한때 함께했던 동료. 이제 상황이 끝났고 정치의 이야기로 넘어갔으니 잊어야 하는데 아직도 그들이 군에 남아있는 동료들을 떠올리게 해서 나를 흔들고는 한다. 전역 당시 이건 배신인가, 아닌가,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며 떠났는데 아직도 이건 배신인가, 아닌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다음 주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성묘를 간다. 오랜만에 모든 가족들이 모여 움직이는데 아무 사고 없이 잘 다녀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