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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레맛곰돌이 Dec 16. 2024

4. 멈추고 돌아볼 시간이 있을까요?

병사와 하사 사이

 내 병사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집합도 당하고, 악폐습도 좀 당해보고, 탁구도 치고, 성당에서 기쁜 성탄을 함께 보내기도 하고, 함께 연주도 하면서, 그렇게 끝났다. 가장 큰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오른 월급이었다. 이등병 시절에 6만 원 남짓을 받다가 병장이 되어 10만 원 조금 넘는 돈을 받고, 전역 직전에는 갑자기 월급이 두 배로 뛰어 20만 원 정도 되는 돈을 받았으니. 나는 솔직히 20만 원 줄 때 나라 망하지는 않나 생각도 해봤다. 이렇게 많이 줘도 괜찮나? 하고 걱정이 될 정도로 당시의 내게는 놀라운 돈이었다는 의미다.


 나는 이 돈을 악착같이 모았다. 병사에서 하사가 된 이후, 그 사이에 월급이 들어오지 않아 모아둔 돈으로 버텨야 하는 기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2년 동안 내가 모은 돈은 70만 원 남짓, 애초에 달에 7만 원, 8만 원 받으면서 어떻게 저 돈을 모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2만 원씩 적금을 넣었고, 주택 청약에도 돈을 조금 넣었고, 남는 돈을 모으고 모으면서 살았을 뿐이다. 부모님께 손 벌리는 게 싫어서. 나는 병사 때부터 이미 직장이라 생각하고 일하고 있는데 손을 벌리면 일하는 입장에서 자기 관리도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지니까. 그런 바보 같고 개인적인 이유였다. 돌아가는 차표는 끊어주겠다고 늘 말씀해 주셔서 겨우 저런 돈을 모았지만 말이다.


 아마 이 이야기는 긴 이야기가 될 거 같다. 내 생각을 끊어서 정리하지 않아도 될 만큼 긴 이야기. 오늘은 나의 전역과 임관의 이야기다.


 새로 임관한 간부들이 당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숙소다. 그들이 묵을 곳은 없고, 자리는 언제나 부족하다. 그래서 새로 임관한 간부들은 당연하게 맞선임이나 선배의 집에서 며칠을 묵게 된다. 아니 몇 달을 묵게 된다. 숙소가 나올 때까지 묵어야 하니까 사실상 기약 없이 그 숙소에 기생하며 산다는 의미다. 5평 남짓의 원룸에 원주인의 침대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아래 복도처럼 짧게 놓인 길에 하사 한 명이 겨우 누워서 그렇게 산다. 비참하게, 실로 비참하게.


 참고로 이 이야기는 우리라고 달라지지 않았다. 전역 직전 우리는 말년 병장임과 동시에 곧 임관할 간부로서 하나하나 행정처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바로 숙소, 사실 숙소를 제외하고도 다음 월급날까지 아무런 지원금이 없기에 남는 돈으로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다른 문제도 있었지만, 그거보다 더 큰 것은 숙소였다. 당장 병사 생활관에서 쓰던 짐을 어디에 치워놓고 살라는 이야기인지. 전역 날이 가까워질수록 다들 걱정이 늘었고 주임원사님께 빈 생활관에서 살면 안 될까요, 단체로 묵을 임시 숙소라도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여러 번 이야기를 드려봤지만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결국 전역, 그날이 왔고 모두 어떻게든 살아보자는 이야기와 함께 생활관을 떠났다. 그래도 선배들도 이런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알아서 그런지 모두 그들을 받아들여줬고 다들 떠날 때의 이야기처럼 어떻게든 살게 되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었는가. 아마 간부가 된 후에 이런 곳에서 살았다는 사람은 처음 들을 거 같은데, 나는 놀랍게도 성당에서 거주하는 군종병 숙소에서 군종병들과 함께 묵었다. 불법 체류자의 기분으로 말이다.


 전역 직전에 숙소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성당에서 꺼냈는데 군종병들이 먼저 내게 "현규씨, 그러면 우리 함께 사는 게 어때요?" 하고 권유해 준 것이다. 당시 선배와 기수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권하기 어려웠던(그리고 숫기가 없어서 먼저 말을 꺼낼 수 없었던) 내 입장에서는 너무도 고마운 이야기였다. 그래서 신부님이 허락만 해주신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불쌍한 제오르지오가 숙소를 찾지 못했다니. 제오르지오, 차라리 사제관에서 같이 묵는 건 어때요?" 


 신부님은 그 이야기를 들으시자마자 내게 사제관에서 함께 생활하자는 권유를 주셨다. 너무 감사하기는 한데... 솔직히 그건 신자의 입장에서 부담스러운 권유라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사실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당시 안토니오 신부님이 너무 술을 잘 드셔서. 20대 둘을 데리고 마시면 두 발로 들어온 두 사람이 네 발로 나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의 말술이셔서 차마 같이하지 못한 것이다. 같이 살다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진짜 죽을 거 같아서.


 신부님의 권유는 정중히 거절하고 대신 병사 숙소에서 묵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래서 짐을 옮긴 후에 두 사람이 이층 침대에서 잘 때 바닥에 침낭을 깔고 눕고(이 와중에 친절한 군종병들은 나보고 침대에서 자는 건 어떠겠냐면서 자신들의 잠자리를 비켜주려고 했었다. 아직까지도 친절을 베푼 두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며 살고 있어요.) 평소에는 같이 TV 보고 기도하며 짧고도 긴 시간을 보냈다.


 짧고도 긴 시간이라고 이야기를 한 이유는, 임시 숙소가 생각보다 빨리 나와 다 같이 묵는다는 조건으로 3주 만에 방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건 굉장히 이례적인 속도였다. 보통 숙소를 신청하면 임시 숙소는커녕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최소 3달에서 많게는 1년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은데 3주 만에 숙소가 나오다니. 사실 이건 주임원사님이 많은 힘을 써주신 결과였다. 이번 기수 특성화고 출신 전문하사가 많기도 하고 다들 평이 좋았으니 관사관리반과 많이 협상을 해서 숙소를 하나 따오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 성당 생활은 끝이 났다. 다음 월급날까지 70만 원으로 버텨야 했던 밑바닥의 하사가 성당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해 주시던 날, 임시 숙소에서 살라는 연락을 받아 입주와 퇴거 축하 파티를 동시에 하게 되면서 말이다. 사실 모아놓은 돈이 70만 원 남짓인 와중에도 다음 월급날까지 무사히 살 수 있었던 이유도 성당 덕분이었다. 지원받은 라면을 저녁에 같이 끓여 먹고, 군종병들을 위해 급양병들이 싸준 반찬을 함께 나눠먹고, 내 소식을 들은 관사 가족 분들이 소정의 음식을 싸주시고... 그게 아니었다면 싸구려 침낭을 살 돈이나 남았을까.


 하사가 되면서 해오던 모든 일들이 바뀌었다. 더 이상 공구를 챙기지 말라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정비작업에 같이 뛰어들기 시작했고, 때로는 부딪히고 때로는 깨지며 본격적인 업무를 배우기 시작했다. 솔직히 정신없고 괴로운 시기였다. 그런 와중에도 나를 지탱한 것은 이런 불쌍한 이웃을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간부와 병사는 적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내가 먼저 다가가자. 내가 무해한 사람이고, 다른 이들에게 받은 만큼 베풀 준비가 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자. 결과적으로 이는 내 복무신조가 되었고 내가 받은 만큼 후배, 병사들을 도와주면서 남은 7년의 시간을 보냈다. 다른 비행단으로 전속을 갈 때도, 전역을 할 때도 많은 후배들이 즐거웠고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전해줬는데, 나는 내가 받은 만큼의 사랑을 남들에게 나눠줬을까. 그 대답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이 언젠가 해주리라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하면 아직도 많은 이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고 더러는 믿지 않기도 한다. 간부가 군종병들 숙소에서 함께 묵으면서 퇴근 후에는 성당 업무를 같이 봤다고? 하지만 이런 말을 알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가짜처럼 들리는 이야기도 군대에서라면 진짜다. 언제나 그렇듯 내 이야기는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인 이야기들의 연속이다. 하지만 만약 군종병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내가 누군지 바로 기억해 낼지도.


 참고로 새로운 임시 숙소가 나왔다고 삶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너무 오래된 숙소여서 난방도 자기 멋대로 움직였고 새 이불을 살 돈이 없어서 겨울에 쓰기에는 조금 얇은 침낭을 두른 채 벌벌 떠는 하루하루를 보내고는 했다. 첫 달 찍힌 월급은 200만 원 남짓이었다. 한 달 월급+전역 이후 나오지 않았던 월급까지 소급해서 나온 금액이 저 정도였고 실제 월급은 160만 원 남짓. 이렇게 이야기하니 꽤나 비참하다. 실제로 내가 근무하던 당시 호봉이 낮은 하사들은 160만 원을 겨우 받으며 생활하고는 했다. 뭐, 달에 10만 원 겨우 받던 내가 갑자기 160만 원을 받게 되었으니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였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항공 정비사에게 어림도 없는 월급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다음부터는 다시 기억을 아카이빙 하는 시간이 반복될 거 같다. 긴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짧은 기억의 아카이빙이 연속되리라 생각한다. 기억에는 저마다의 길이가 있어서 늘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도 이 이야기를 적을 수 있어서 좋았다. 슬픈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이런 기쁜 이야기도 함께 나눠야 비로소 사람 사는 이야기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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