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사 생활의 시작
사실 하사가 된다고 해서 뭐가 당장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다. 해봤자 계급장이 꺾이고 야상외피 어깨에 견장이 하나 생기고 하는 일은 예전처럼 똑같이 정비와 서포트. 예전에 하던 업무가 반복되니까 어떨 때는 병사 생활의 연장선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그런 느낌을 받게끔 만드는 사람들은 바로 같이 일하던 병사들이다.
호형호제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말년 병장이 갑자기 하사가 된다고 김 하사님, 이 하사님, 깍듯해지겠는가. 그냥 사무실에서는 김 하사님 불러도 돌아가는 길목에는 형 동생 하면서 다니는 거지. 나도 그렇게 생활했고 내 후배들도 그렇게 생활했다. 그래서 솔직히 큰 감흥이 없었다. 내가 하사가 되었다는 느낌도 없었고, 무엇보다 지난 글에서 나온 일들처럼 앞으로 마주할 일들이 너무 많아 당장 살기에 바쁘기도 했고.
그런 루즈한 감정에서 우리를 건져 올려 정신을 차리게 하는 사람은 당연하지만 선임 하사들이다. 이제 하사가 되었으니 다르게 대하겠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하나하나 업무를 가르치고 인수인계하는 작업이 이뤄진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반년이 지나면 이제 병장시절 함께했던 병사들은 전역하고 점점 내가 하사였던 시절의 모습만을 봐온 병사들이 늘기 시작하면서 간부가 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기수는 조금 이르게 간부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사유는 집합이었고 계기는 회식이었다.
4월이 되면 중대 단위로 회식을 진행한다. 2월에 전문하사가 되는 인원들과 3월 항공 과학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사가 되는 인원, 거기에 부사관 후보생으로 임관한 인원들이 배치되면서 중대에 갑자기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4월만 되면 신임 하사들에게 부담스러운 회식이 진행된다. 처음 보는 아저씨들이 술을 따라주면서 같이 한 잔 하자고 하고 꼭 건배사를 하라고 시키는 부담스러운 회식.
일반적인 경우 군에 입대한 하사들은 부사관이 첫 사회 생활인 경우가 많다. 고등학교 갓 졸업한 항과고 학생들이나 군에 바로 입대한 전문하사들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부사관들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하는 경우가 대다수니까. 그래서 그들은 이 회식을 통해 직장 내 회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대충 눈으로 보게 되고 눈치만 좋다면 앞으로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대충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를 느낄 수도 있고.
'무언가 잘못되었구나.'
회식 자리는 좋았다. 그냥 하하호호 적당히 식사하고, 선배들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술도 조금 마시고 좋았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하사 전원 12시까지 장비실로 모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유는 특별히 고지되지 않았고 집합명령을 내린 사람은 하사 최고참, 내 사무실 선배이자 성격이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아, 무언가 잘못되었다. 저 사람이 부른 거면 좋은 이유는 아닐 텐데.
불이 다 꺼진 장비실은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고 일찍 모인 하사들은 신임 하사들을 말없이 더 으슥한 장소인 세척실로 불러들였다. 다들 여기로 모일테니 여기서 가만히 각 잡고 있으라고. 시간이 12시에 가까워지면서 한 명 한 명 사람들이 모였고 한 성격 좋은 선배는 분위기를 희석시켜 주려는 듯 무슨 일로 모였는지 아냐고 넌지시 던지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12시가 되자 처음 집합하라고 말한 선배가 들어왔다. 그는 굉장히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세척실에 들어왔고 덜컥, 문을 닫으면서 조곤조곤 사람들을 한 명씩 호명하며 씹기 시작했다.
"어제 회식 때 술 안 마신다고 빼던 놈은 뭐고 나중에 동기들끼리 모인 녀석들은 뭐야. 회식 몰라?"
집합 사유는 지난 회식에 대한 불만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아서, 배정된 자리에서 먹다가 나중에 자리 옮기고 서로 거나하게 취할 때쯤 동기끼리 뭉쳐서, 선배들은 선배들대로 술 마시라고 권하지 않고 그대로 후배들을 내버려 두어서,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평소 태도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덧붙였다. 누가 대답을 똑바로 하지 않는다, 출근 시간이 8시 30분인데 8시에 출근하는 녀석들은 정신이 있냐, 평소에 왜 얼빠진 듯 행동하냐.
사실 악의적인 지적이었다. 회식에서는 술을 강권하고, 8시 30분이 근무 시작이면 7시 50분까지는 출근하라고 강요하고, 걸음걸이, 목소리,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회에 있는 기업에서도 이런 것들을 지적할까? 그것도 이제 겨우 1주, 2주 업무 시작한 애들한테. 늘 있는 분위기 잡기였다.
이런 집합은 그 후에도 번번이 발생하고는 했다. 보통 중대 단위 회식이 끝나고 다음날에는 무조건 한 번, 그리고 특정 행사가 있은 후에도 한 번, 선배들한테서 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한 번, 달에 한 번, 많게는 두 번 모인 적도 있었다. 솔직히 나는 이런 문화가 싫었다. 처음에는 거창한 이유에서 부른 것처럼 말하지만 개인적으로 불러서 이야기해도 되는 것들이 대다수였고, 결국은 트집 잡기로 끝나고는 했다. 그리고 내가 더욱이 싫어했던 집합의 연례행사는 최선임 하사 한 명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 사람이 나가고 다음 사람이 나와 후배들을 갈구고, 끝나면 다음 사람이 나와 후배들을 갈구는 내리 갈굼 문화였다. 나중에 나오는 사람들은 화를 낼 마음도 없지만 억지로 불려 나와 화를 내게끔 강요당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어떤 이는 이렇게 자기 점심시간을 뺏기니까 할 말도 없었다가 갑자기 화가 나서 후배에게 한소리 하기도 하고...
이런 무의미한 짓을 왜 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했고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막내 하사인 내가 없앨 방법은 없었다. 무엇보다 신고와 같은 방법으로 해결해 봤자 앞으로 남은 4년의 군생활이 꼬일 게 분명하니까. 결국 나,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던 이들도 오랜 시간 고통받으며 엎드려 살았고 2년의 시간이 흘러서야 이 문화를 없앨 기회가 생겼다.
솔직히 기수 운이 조금 따랐다. 5년차 선배들은 모두 장기복무가 되지 않아 자기 살 길을 찾기 바빴고, 4년차 선배들은 애초에 장기복무를 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후배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집합과 같은 후배 기강 잡는 업무를 어느 순간부터 3년차 하사 중 최선임인 나와 내 후배들에게 내려온 것이다. 이 업무가 손에 잡히자마자 우리는 이야기했던 대로 집합을 아예 하지 않고 일을 해결하기로 입을 모았고 그렇게 길었던 악폐습은 사라졌다.
"나는 솔직히 이 짓을 왜 하는지 잘 모르겠어. 나중에 선임 하사가 되면 집합은 안 하려고. 다들 솔직히 이렇게 모이는 거 싫잖아? 나중에 누가 선임 자리에 앉아 있든 하지 말고 서로 이야기해서 잘 풀어보자. 내가 당장 나가면 그림 이상하니까 다 같이 조금 있다가 나가자."
쓸모없는 집합에 시달리던 내가 2년차 시절에 했던 이야기가 생각보다 일찍, 그리고 빨리 해결된 것이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었는데, 그냥 개인적으로 잘 이야기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는데 왜 우리는 집합에 매달렸을까.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냥 군대라는 조직이 문제가 없다면 관성적으로 굴러가는 조직이고 안에 몸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과거의 풍습을 악습이든 전통이든 무의식적으로 따르기도 해서? 아니, 사실은 그보다 확실히 들은 게 있어서 알고 있다. 내가 하사 생활하기 이전 선배들은 더 끔찍하게, 폭력과 함께 살아서 그게 몸에 밴 것이다.
예전에는 영내 하사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병사들처럼 일정 기간을 영내에서 생활하는 하사 제도로 사실상 병사 생활관처럼 하사 생활관을 운영하는 제도인데, 문제는 여기에 있는 선배들이 늘 기합과 폭력으로 기강을 잡았다는 점이다. 주말이면 줄 세워서 패고, 선임이 왔는데 뛰쳐나와 인사하지 않으면 밤에 불러서 패고, 평일 저녁에 기강이 해이하다 싶으면 기합을 주고.
우리 이전의 하사들은 이런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그들의 삶에 폭력은 늘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들도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는 수를 떠올리지 못한 건 아닐까. 이미 너무 오래 폭력에 노출되어서, 대화로 푼다는 방안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폭력에 노출되어서.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 집합은 기합을 주는 행위도 아니고 폭력도 아니니 어떻게 보면 대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집합이 없어지고 일 년, 이 년, 시간이 흐른 후에 한 선배에게 요즘에는 애들 집합 안 시키냐는 장난스러운 투의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거기에 웃으며 대답했다. 요즘에는 말로 잘 타이르고 있다고. 언제든 문제 있으시면 말씀 주시라고.
한편으로는 영내하사복무제도로 9개월간 폭력에 시달렸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올라오고는 한다. 이유 없이 생활관에서 두드려 맞고 너무 화가 나서 밤마다 뛰러 나갔다는 선배부터 너무 괴로워서 당시 조금 힘든 시절을 보냈다는 선배, 운동할 때도 눈치를 보며 했다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니 그들도 불행했구나, 당시 군대는 다들 불행했구나 생각하게 된다.
없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한 10년 되었나. 그러니까 2010년도 중반까지만 해도 하사 생활관에서는 폭력이 있었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군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늘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따라 나온다. 별로 이런 이야기를 적고 싶지는 않은데 또 다들 모를만한 이야기다보니 한 번은 다뤄보고 싶었다.
그리고 위에서 8시 30분 출근이면 적어도 7시 50분까지 출근하라고 강요했다는 이야기는 내가 몇 년동안 당했던 이야기다. 정말 멍청한 생각이라고 사석에서 많이 말하고 욕하기도 했던 이야기인데, 당시 선배들은 그냥 먼저 출근해서 정비교본을 펼쳐 놓는 후배를 좋아했다. 그래서 더러는 일찍 출근한 후에 정비 교본만 앞에 펼쳐 놓고 핸드폰을 만지기도 했었고, 보는 척 커피만 마시는 친구들도 있었다. 문제는 이 분위기의 연장선으로 최소 30분은 일찍 출근하지 않으면 지각한 것처럼 사람들이 대우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8시 10분에 출근하는 하사는 늘 불려가서 욕을 먹고는 했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몸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다음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 해보고 싶다. 회식도 좋고 운동도 좋고, 아무거나 좋으니 이번에는 폭력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가져와보겠다. 안 그러면 진짜 군대 고발 글이 될 거 같다. 내 기억을 정리하는 글인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