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친형이 갑자기 '로드 오브 워'를 다시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가끔은 봤던 명작을 다시 보고 싶어 진다고 하던가. 문제는 이제 그 영화를 찾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로드 오브 워'는 몇 달 전에 OTT에서 모두 내려갔고, 정식 루트를 통해서 볼 방법은 없어졌다. 이 영화는 이제 유튜브에서도, 넷플릭스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영화다. 그는 결국 "팔면 돈이라도 내고 사서 볼 텐데!"라는 단말마와 함께 어떻게든 구해서 감상했다(어떻게든에 대한 답변은 비밀로 남기겠다. 솔직히 나는 관심이 없기도 했고).
시간이 좀 지나고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만든 후 서평을 올리면서 독립서점, 북스타그램을 운영하는 다른 사람들의 계정을 보다 이 책을 발견했다. '영화도둑일기', 네이버와 P2P 사이트, 토렌트를 지나 현재 OTT까지 넘어온, 00년대를 관통했던 이들이라면 생각할 거리가 생기는 제목. 그렇기에 이 책의 출간을 기다렸고, 출간 후 여러 서점을 뒤적거리다 끝내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책을 받은 후에 든 생각은 하나, '중소형 서점에서 찾지 못한 이유가 있었구나'. 책의 질감, 표지 디자인, 앞날개와 뒷날개, 투박한 차례. 이건 요즘 책이 아니다. 어떻게든 예쁘게 보이기 위해 공들이고, 어떻게든 책장에 꽂았을 때 만족감을 주기 위해 신경 쓰고, 어떻게든 다른 시선들에게서 독서가로 젠체할 수 있도록 있어 보이게 만든 책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제목과 걸맞다. 한 도둑의 수기와도 같다. 그리고 이 수기는 곧 우리 내면에 있던 작은 생각과 겹침을 알게 된다.
210x148, 152p의 이 책은 전형적인 얇은 국판의 도서임에도 평소 읽던 도서들과는 사뭇 다른 독서감을 주리라 생각한다. 종이가 주는 감각, 손에 잡히는 느낌, 내지와 레이아웃, 낡은 폰트와 잉크가 번진 게 아닌가 느낄 정도로 불쾌한 볼드체. 굳이 이 책이 정확히 어떤 도서와 비슷하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아마 과거 대학 문예지나 재미로 엮은 잡지와 같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이 도서에게 내가 말한 단점과 같은 나열은 반대로 책의 분위기와 어울려 장점이 된다.
작가는 마치 커뮤니티에 썼던 글, 혹은 누군가와 나눴던 이야기를 옮기듯 덤덤히 '영화도둑'으로 살았던 자기의 삶을 정리해 간다. 도둑이 쓴 수기에 화려함은 필요 없다. 그냥 살아온 순간에 대한 추억과 회고만 있을 뿐. 조악하게 만들어진 책은 마치 그 부분까지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고 말하듯 누군가는 불법이라고 말하는 행동을 구태여 숨기지 않는다.
본 도서의 핵심은 영화의 보존과 공유-경험이든 실물이든-에 대한 이야기다.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본인은 히치콕의 무성영화나 찰리 채플린이 출연한 무성영화, 이름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 인도의 실험적인 영화 몇 편을 제외하고는 상업 영화를 자주 챙겨보는 평범한 사람이기에, 실용 영화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해 게임으로 대체해서 이해했고, 여기서도 이렇게 비유를 해보려고 한다는 점이다. 만약 이 책을 읽어보고 서평과 다른 느낌인데?라는 생각이 들어도 이해해 주기를.
손노리는 한 때 국내에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름을 날리던 게임개발사였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포가튼 사가, 화이트데이, 그리고 악튜러스. 고전 패키지 게임을 좋아하는 이라면 모두 한 번씩은 들어봤고 혹은 플레이해 봤을 게임들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악튜러스를 특히 좋아했다. 어린 시절 불법적인 경로로
구해 플레이한 게임은 2000년에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깊이가 있었고, 완성도가 부족하거나 버그가 있는 등 플레이에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그런 점도 모두 감수할 만큼의 수작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런 게임들이 네이버 카페나 P2P 사이트, 토렌트에 버젓이 놓여 있었고, 반대로 내가 이 게임을 플레이하던 시절에는 이미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기에 정식으로 게임을 구할 방법이 없기도 했다.
이제는 스팀이 국내에 활성화되어 과거 게임들도 다시 올라와 팔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악튜러스는 여기에 해당되지도 않기에 정식으로 구할 방법은 없다. 즉, 이 감정을 공유하고 이 게임을 보존해 후세의 사람들과도 함께하기 위해서는 '도둑질'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다(CD 패키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윈도우 11을 쓰는 시대에 98 시절 CD는 구연되지 않는 골동품이니까). 그렇기에 지금도 '영화도둑'처럼 '게임도둑'들이 이 경험을 후세에 나눠주고 있다. 그리고 혹자는 이들이 더 좋은 경험으로 게임을 즐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래픽 업그레이드를 진행하고 있다. 이는 토렌트나 이 책에서 나오는 카라가르가, 혹은 유튜브나 블로그 같은 장소에서 번역 파일을 나누는 이들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잊혀져 버린, 혹은 그 잠깐을 위해 존재했던 영화들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붙여주는 사람들.
어린 시절 형이 찾아준 영화를 컴퓨터 모니터로 함께 볼 때면 영화 도입 직전에 번역자의 이름이 나오고는 했다. 네이버 아이디, 혹은 어딘가의 닉네임이었다. 나는 당시 그들이 영화에 언어를 붙이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P2P 사이트에서 100원, 200원을 벌기 위해? 하지만 2시간 가까이 되는 영화를 번역하는 일이 쉬운 것도 아닐 텐데 그 가치가 100원, 200원으로 충족이 될까? 그 생각은 어린 시절에 멈췄고, 어른이 되면서 조금 더 어른의 사정에 가까운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영화 번역가 지망생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일본 만화를 번역하고 이를 결과물 삼아 포트폴리오로 짜는 이들처럼 하나의 커리어 겸 소일거리라고 생각하고 번역했을 것이다. 하지만 책에 쓰여있는 이야기는 더 덤덤하고 바보 같으며 인간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자막 번역은 남한테도 도움이 되고 나한테도 좋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또 거기서도 보상이 오고요. 돈을 못 벌어도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해야죠." 100p~101p 일부 발췌
어제 F1 마이애미 그랑프리 스프린트 레이스 경기를 새벽 1시에 보고 5시에 있을 퀄리파잉 세션을 보기 위해 깨있는 동안 읽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스프린트, 퀄리파잉보다 이 책이 더 값졌다. 스프린트 경기는 시작하자마자 헤밀턴의 1번 코너 진입 실수로 애스터마틴 드라이버 둘이 충돌해서 그대로 탈락했고, 퀄리파잉 세션에서는 Q2 탈락을 해버렸으니까. 이게 무슨 재앙인가 싶다.
악튜러스는 언젠가 다시 깨고 싶다. 어떤 게임의 표절작, 미완성작품, 불편한 게임성과 한국 게임 시장에서 웃음벨 그 자체인 이름 '손노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추억을 상징하는 작품이고, 내 어린 시절 고전 게임 탐방의 꽃이던 작품이기도 했다. 나는 이 감성이 후대에도 많이 전해지면 좋겠다. 지금은 네오위즈나 시프트업과 같은 기업들이 AAA급 게임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고, 넥슨과 같은 대형 게임사들도 AAA급 게임 시장에 출사표를 던지려 하고 있지만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패키지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던 이들이 있었다는 기억이 남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의 철학을 담은 작품을 만들려고 했다는 기억도.